키스 헤링(Keith Haring)의 회화세계와 낙서화 연구

제1호 《아트홀릭》수록. 2010년 9월 발행
 
 
최수형 1
 
1. 머리말
2. 키스 헤링 낙서화의 형성 배경
3. 키스 헤링 회화세계와 낙서화

    1) 신화· 종교적 주제
    2) 사회· 정치적 주제
    3) 동성애적 주제

4. 키스 헤링 낙서화의 특징

    1) 기호적이고 간략한 만화적 드로잉
    2) 사회 문화적 주제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

5. 맺음말
 
 

1. 머리말

 

  키스 헤링(Keith Haring, 1958-1990)은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 1988)와 함께 뉴욕의 지하철역이나 광고판 위에 분필과 마카 등의 재료를 이용해 작품 활동을 한 낙서화가이다. 아주 단순한 배경에 만화적 요소가 보이는 인물과 형상들을 그리는 독특하고 특징적인 양식을 개발한 낙서화 분야의 선구자로,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그의 예술이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랐으며,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작업과 더불어 많은 사회활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자신의 자서전이나 많은 인터뷰에서도 언급했듯이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중요시 하였는데, 자신의 작업을 통해 정치적 사회 문화적 이슈와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키스 헤링의 작업의 배경이 된 1980년대 뉴욕사회는 키스 헤링의 독창적인 양식이 싹트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고 키스 헤링의 작품 역시 미국의 문화적 요소를 가장 잘 표현한 미술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20-1930년대 가볍고 유쾌하며 악의 없는 선량함으로 대표되는 미국적 정서의 대명사인 월트 디즈니 사(Walt Disney Productions)의 애니메이션, 대량 생산과 대중 소비문화를 냉소적이고 관조적으로 형상화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팝아트 그리고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엽에 걸쳐 주로 소수 빈민 인종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갈등과 문화적 표현 욕구의 발현으로 뉴욕 시내 곳곳에서 전개된 낙서화 운동은 그의 미술 세계를 형성시킨 3대 요소들이다. 2

  이렇게 낙서화가 처음 등장 하였을 때만 해도 공공기물 파괴범죄 행위 중 하나로 여겨졌던 사회적인식이 어떻게 하여 대중문화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키스 헤링의 작품 속에서 보여진 정치, 사회, 문화적 요소 등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2. 키스 헤링 낙서화의 형성 배경

 

  낙서는 특정한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탄생한 미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1980년대 낙서화 운동은 1960년대 말 반문화운동의 일환에서 시작되어 1980년대 초엽에 이르는 약 10여년의 기간 동안 뉴욕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낙서화가들은 거리나 지하철 등 공공시설물에 선을 긋고 스프레이(spray)를 뿌리며 자유분방하게 자신을 표현하였고, 이렇게 손쉽게 발견된 낙서 그림들은 점차 어디서나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장난이나 공공기물 파괴행위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들의 그림에는 특성을 지니기 시작했고, 집단적인 규모와 조직적인 미술 운동 형태를 띠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완성도와 기법적으로 독창성도 가지고 있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낙서화를 시각적 공해를 일으키는 공공기물 파괴 범죄행위인 반달리즘(vandalism) 3이라고 여겼지만, 낙서화가들은 낙서를 하나의 표현의 장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 후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하게 되면서, 범법행위 즉 주변 문화(outside)로 여겨지던 낙서가 미학적 가치를 지닌 미술행위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4

  뉴욕의 낙서화 운동은 지역적으로는 흑인과 소수 하위 계층 인종이 모여 사는 브롱스(Bronx) 워싱턴 하이츠(Washington Heights) 할렘(Harlem) 사우스 브롱스(South Bronx) 브루클린(Brooklyn)등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즉 뉴욕의 주변 도시들이 낙서화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타키 183(Taki183)에 관한 뉴욕타임지 기사  1971년 7월 21일자

타키 183(Taki183)에 관한 뉴욕타임지 기사
1971년 7월 21일자

  이러한 낙서화의 본격적인 시작은 1971년에 등장한 ‘타키 183(Taki)’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뉴욕 거리와 건물 곳곳, 지하철 내부 벽면 등에 수없이 낙서를 한 후 ‘Taki 183’이라는 필명을 작품마다 남긴다. 사람들은 이 낙서에 익숙해지고 뉴욕 시민들에게 이것이 화제가 되면서 뉴욕 타임즈지(The New York Times)가 낙서의 인물을 추적해 신문에도 싣게 되었다.

  타키 183은 드미트리(Demetrius)라는 17세의 학생으로, 타키는 그리스식의 애칭이며 183은 그가 살고 있는 ‘워싱턴 하이츠(Washington Heights)의 183’ 즉, 그의 집 주소였다. 그는 뉴욕의 지하철역에서 물건이나 서류 등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는데 일을 하면서 손에 늘 소지하던 마카로 같은 사인을 하고 다닌 것이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이런 낙서를 한 인물을 찾아 기사를 실었다.

  마카에서 시작한 낙서는 점점 스프레이 캔으로 바뀌었고 낙서화만을 하는 그룹 등도 등장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러한 행위를 범죄행위로 여기던 뉴욕사람들도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였고 뉴욕의 낙서는 유럽으로도 확대되었다. 5

  이처럼 낙서화(graffiti) 6는 선사시대 동굴벽화나 암각화에서 출발해 현대에 와서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발견되는 스프레이 아트(spray art)로 이어지게 되었다. 7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고 약간은 눈에 거슬리는 표현으로 범법행위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충만한 에너지와 함께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소외 받은 계층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정치 사회 종교 등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가지고 있는 키스 헤링의 낙서화는 현대 회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미술형식의 하나로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3. 키스 헤링 회화세계와 낙서화

 

  키스 헤링(Keith Haring, 1958-1990)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Pennsylvania)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앨런 헤링(Allen Haring)과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TV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키스 헤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Pittsburgh)에 있는 아이비 전문미술학교(Ivy School of Professional Art)에 진학해 광고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러나 2학기만을 마친 후, 학교를 중퇴했고 자신의 작업방향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피츠버그 아트센터(Pittsburgh Center for the Arts)에서 소규모의 드로잉과 회화를 중심으로 첫 번째 전시회를 가진 뒤, 다시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School of Visual Art/SVA)에 입학했지만, 대중과 소통하는 작업을 하기위해 학교를 그만 두고 지하철역 및 뉴욕의 거리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롭고 대안적인 작업에 매력을 가지고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와 케니 샤프(Kenny Scharf, 1958- ) 등과 친분을 가지며 전시와 공연 등을 함께 했다.

  1980년에 뉴욕의 지하철역에 흰색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재빠르게 자신만의 특징적인 양식을 개발한 후 일회성에 그치는 낙서화가에서 일약 유명 화가가 되었다. 이 후 키스 헤링은 전통적 갤러리의 전시개념에서 벗어나 저급미술과 고급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지역사회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정치·사회·문화적 내용을 담은 공공벽화 등의 작업도 많이 볼 수 있다.

 

1) 신화· 종교적 주제

 

  키스 헤링의 드로잉에서는 십자가의 의미 등 종교적인 암시를 종종 볼 수 있다. 1984년에 키스 헤링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발레작품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위한 무대세트의 제작을 의뢰받았다. 작품명은「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 으로 중앙에는 결혼식의 중요한 순간이 묘사되어 있고, 그 주위에는 날개가 달린 존재물들의 활기 넘치는 찬양이 표현되어 있다. 천국의 손이 지옥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있으며, 지옥의 손은 승리주의자(Triumphalists)의 요소를 나타내는 사탄의 기호를 퍼뜨리고 있다.

키스 헤링 「무제(Untitled)」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화. 304.8×365.8㎝. 1985

키스 헤링 「무제(Untitled)」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화. 304.8×365.8㎝. 1985

  1985년에 제작한「무제(Untitled)」는 종교의 영향과 그 전형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종교는 그 자체가 담보로, 갈퀴같은 혀를 가지고서 인간의 소유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빼앗는 탐욕스러운 존재로 그려졌다.

  성경의 메시지는 정신적, 육체적, 성적인 자율성을 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라면 넓은 색면으로 처리되었을 화면은 세심한 도안과 색의 명암법으로 묘사되었다. 성경주제를 명확하게 다룬 1985년의「모세와 불타는 덤불(Mosesand the Burning Bush)」은 이와는 정반대의 작품이다. 불타는 덤불을 통해 신은 모세와 계약을 맺었는데, 이는 수태고지를 상징한다.

  화면은 춤추는 불꽃의 밀도 높은 물결로 덮여 있다. 윤곽선은 이 물결의 뒤에 숨겨져 있어 알아보기 힘들다. 키스 헤링은 1989년에 그린 후기작품 「길의 꿈(Gil’s Dream)」에서 기독교 도상들 중에서 더욱 근원적인 상징을 다루었다. 중앙의 십자가에 매달린, 몇 개의 선만으로 그린 그리스도는 십자가 윤곽과 완전히 통합되었다. 인물과 십자가의 단일성은 두 형상 사이의 공간을 다룬 표현 방식에 의해 강화되었다. 비록 헤링이 종교적 상징을 사용했지만, 그를 전통적 의미에서의 기독교 예술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기독교적 상징이 어느 범위까지 종교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해석될 수 있는지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실제 폭력의 관점에서, 이런 상징을 포함해 여러 작품에서 묘사된 공포와 질병은 냉소적인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8

  1985년 그는 보르도(Bordeaux)의 현대 미술관(Musee d’Art Contemporain de Bordeaux) 지하실에 있는 10개의 아치에 기독교 십계명을 주제로 한 벽화를 그렸다. 「십계명」은 십계명의 계율에 맞춰 10개의 개별적인 그림을 하나하나 그린 것으로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4가지 색만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들 그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대중은 파란색의 작은 사람들로 나타나며 이들을 지배하는 계율이나 심판자는 모두 빨간색의 커다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십계명의 내용을 충실하게 해준다. 키스 헤링의 도상학은 세계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악의 상징들을 통합한다. 그의 춤추는 원인(原人), 빛나는 아이, 천사가 기술시대의 혼성기술, 악마의 정자의 그림, 핵 재앙, 돌연변이들은 어두움을 상쇄시켜 준다.

  그가 죽은 후 발견되었지만 은종이와 금종이를 가지고 얇은 마분지에 완성한 15개의 작은 수미(水味)잉크 드로잉 시리즈는 섬세하고 내성적인 드로잉으로써 삶, 죽음, 부활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종교적 상징이 기호화 되어있다.

 

2) 사회· 정치적 주제

 

  키스 헤링이 지하철역에 그린 드로잉들은 하나의 퍼포먼스로써, 키스 헤링 자신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들은 지하철 이용객들에게 시사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등의 많은 역할을 했다. 그의 지하철역 드로잉작품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내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 할 수 있었고 일회성의 낙서화가 아닌 대중적인 화가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키스 헤링「무제(Untitled)」비닐 천위에 비닐잉크. 366×336㎝. 1982

키스 헤링 「무제(Untitled)」 비닐 천위에 비닐잉크. 366336㎝. 1982

  그는 이러한 낙서화에 대해 “낙서는 즉흥적인 제스츄어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낚아채기 때문에 실수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것이 다 그려졌을 때 그것은 완성된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작업한다. 나는 같은 종류를 가지고 계속해서 고민하기 보다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데 흥미를 가지고 있다” 9고 언급하며, 낙서화를 새로운 것의 시도와 즉흥성으로 보았다.

  「무제(Untitled)」는 복부에 곡예하는 개들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의 큰 구멍이 있는 사람을 개가 지나는 그림이다. 이 비현실적인 인물은 특별한 사건을 암시하는데, 1980년 존 레논(John Ono Lennon, 1940-1980)이 한 팬에 의해 총격을 당해 죽은 사건에 대한 충격을 표현한 것으로 키스 헤링의 말에 따르면 “이 사건은 도시 전체를 믿을 수 없이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배에 구멍이 뚫린 한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항상 그 이미지에서 존 레논의 죽음이 연상되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렇게 「무제(Untitled)」라는 작품은 당시의 시사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키스 헤링은 1983년 새해를 맞아 지하철역 광고 패널 상하 두 개에 새해의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을 그렸다.

  위 칸의 사람들은 모두 엉덩이가 붙어있고 옆에는 키스 헤링의 태그인 짖는 개가 그려져 있다. 아래 칸에는 사람이 양팔에 뱀을 들고 있는데 사람의 몸에는 새해인 1983년을 상징하여 ‘83’이라고 쓰여 있는데, 새해를 맞는 기쁨을 나타낸다.

  가운데 부분은 시인 르네 리카르드(Rene Ricard, 1946- )가 붙인 제목으로 ‘빛나는 아기’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헤링의 지하철 드로잉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태그 중 하나이다. 빛나는 아기와 함께 ‘Happy New Year New York City 1983’ 이라는 글로 마무리 된 이 드로잉은 키스 헤링이 뉴욕 시민과 교감을 위해 제작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키스 헤링의 낙서화의 시작은 취미였다. 이러한 낙서가 시간이 지나면서 취미이상의 열정을 가지고 사회문화적인 이야기를 하며 책임감과 많은 인기에 지하철 낙서는 멈추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는 지하철 드로잉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일종의 퍼포먼스의 하나라고 말했다.

 

“내가 드로잉을 할 때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낮에 드로잉을 했다. 거기에는 내가 드로잉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튼 언제나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나는 드로잉과 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그들의 상호작용을 배우고 지켜보았으며 그것을 하나의 형상으로 보았다.” 10

 

키스 헤링. 뉴욕의 지하철역 드로잉. 1983

키스 헤링. 뉴욕의 지하철역 드로잉. 1983

  「무제(Untitled)」「스탑 에이즈 (Stop AIDS)」는 1985년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주제인 에이즈나, 살인사건, 사회성을 담은 주제를 중심으로 한 작품들로,「무제(Untitled)」는 거대한 팔뚝이 달러를 불태우고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뻗쳐 잡으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1985년 작「마이클 스튜어트-아프리카를 위한 미국 (Michael Stewart-USA for Africa)」은 자신의 나라에서 행해지는 정치의 남용을 지적하며 시대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솔직한 비평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헤링은 경찰에게 폭행당해 죽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낙서화가 마이클 스튜어트(Michael Stewart, 1958-1983)를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응시하는 눈과 공포어린 표정의 희생자가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진 강을 따라 걸으며 무기력하게 가라앉고 있는 동안,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희생자를 발로 차고 목을 조이고 있다. 잠재적인 목격자들은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희생자의 목은 돈의 전능한 손이 감싸고 있다. 똑바른 십자가 상징은 떨어지는 표시로 변형되었다. 차별과 공공연한 폭력이 함께 자행되었다. 11 키스 헤링은 남아프리카계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뜻을 여러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 예로 「남아프리카에 자유를(Free South Africa)」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198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며 제작된 그림이다. 헤링은 미국의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이지만, 과거 백인들의 잘못을 비난하며 백인보다 오히려 다른 인종에게 더 큰 애정을 가졌다.

  1982년 이미 뉴욕 센트럴파트에서 열린 반핵 시위에 자비로 제작한 반핵 포스터를 사람들에게 배포한 그는 그 후 3년 후인 1985년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여 이만장의 포스터를 제작하여 다시 센트럴파크에서 무료 배포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헤링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포스터 제작뿐 아니라 앞서 나온 마이클 스튜어트(Michael Stewart)의 죽음, 존 레논의 살인 사건, 사회 보수층에 대한 비난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실제 사건들을 직접 다룬 이 작품들의 간결하고 단순한 표현 뒤에는 동시대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동성애적 주제

 

  동성애적 주제는 키스 헤링의 섬세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괴물, 기어가는 아기, 몸을 교차시키는 사람 이미지와 난해하게 변형된 여성과 남성의 성기, 성교하는 사람들, 인간과 동물의 성교장면 등 성적인 이미지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키스 헤링,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앤디 워홀(Andy Warhol) 등은 그의 동료이자 친구, 연인으로 동성애적인 시선을 지니고 사회를 바라봤고, 이런 시선은 이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는 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함께 소수의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성문화를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정착시키려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헤링은 이러한 사회적 운동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자신의 성 정체성 또한 숨기기보다는 드러내며 동성애적 문화를 솔직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회운동은 키스 헤링의 작품 속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침묵=죽음(Silence= Death)」이라는 작품은 동성애자 모임의 상징인 분홍색 삼각형을 검정색 바탕에 두고 그 위에 두 손으로 눈과 귀를 막고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중첩되어 표현된다. 이렇게 묘사되어진 눈과 귀를 막은 사람들에게서 에이즈에 대한 무관심과 잘못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헤링은 이런 무관심으로부터 에이즈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에이즈라는 것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1985년 에이즈가 미국 사회에 알려지면서 뉴욕사회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헤링은 작품과 사회운동 등으로 에이즈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과 지원을 해왔고, 1989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키스 헤링 재단을 설립하였고, 지금까지 에이즈 및 어린이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 오고 있다.

  1979년 작품인「무제(Untitled) 」는 남성 성기 이미지로 화면 전체를 올 오버식(all over)구성으로 완성한 대형작품이다. 검은 종이에 하얀색 초크로 세밀하게 그린 작은 남성 성기들은 남성에 집착하는 작가의 성적 정체성이 나타나 있다.

  「위대한 백인의 길」은 현대의 모든 사회적 문제인 금전 숭배, 전쟁, 신성 모독과 난잡한 성애 등을 분홍색 바탕에 검정색으로 드로잉한 작품이다. 이것은 성기 모양의 변형 캔버스로 제작한 것으로 금기시 되어 왔던 성기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키스 헤링은 자신의 동성애와 미술을 교묘하게 잘 결합시킴으로써 이후 등장한 소수미술의 가능성과 제시하고 나아가 미술이 포괄할 수 있는 잠재적 영역을 보다 확장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4. 키스 헤링 낙서화의 특징

 

1) 기호적이고 간략한 만화적 드로잉

 

  키스 헤링은 대담한 필체의 드로잉을 분필이나 마카 등을 사용해 재빠르게 그렸고, 이는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양식을 지녔다. 약간은 만화적인 드로잉 선과 윤곽선이 보이는 그의 양식은 그의 아버지 앨런 헤링(Allen Haring)과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TV만화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알렌 헤링이 취미로 만화를 그렸기 때문에 헤링 역시 자연스럽게 만화를 접할 수 있었다. 키스 헤링은 나중에 어린이들을 위한 팝(pop) 이미지를 구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만화 인물을 만들었다. 그 하나의 선과 만화 윤곽선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드로잉과 매우 유사하며 매우 간략한 드로잉 선이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 만화에 사로 잡혔었다.” 12

  키스 헤링의 작업은 이러한 만화적인 인물들을 사용한 역동적인 패턴을 매우 단순한 배경에 보여주는 효과로 작품들은 지름이 3cm밖에 되지 않은 것부터 길이 100m에 이르는 베를린 장벽이나 가로 세로 50m에 이르는 건물 벽화까지 작품 간의 규모 격차가 크다.

  이런 큰 규모의 헤링의 작업은 제작할 때 구성을 전혀 하지 않고 이미지를 그려 나가는 게 특징인데, 좌측 위 끝부터 드로잉을 시작하여 아래로 화면을 빠르게 메워나간다. 따라서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체로 한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고 짧은 작품 활동 기간에 비해 5,000여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2) 사회 문화적 주제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

 

“내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전철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내 눈에 비쳤다. 나는 즉시 지하철 낙서에 매료 되었다. 드로잉의 완숙함, 색채와 스케일, 대중적 이미지, 잡힐지도 모른다는 위험 그리고 작가와 관객의 직접적인 관계 등이 나를 사로잡았다” 13

  키스 헤링의 작업에서는 신화·종교·사회·정치·동성애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작품을 볼 수 있다. 특히 동성애적 주제는 성(性)에 대한 묘사를 인간과 괴물, 기어가는 아기, 몸을 교차시키는 사람이미지, 난해하게 변형된 여성과 남성의 성기, 성교하는 사람들, 인간과 동물의 성교장면 등으로 나타나며 성적인 의미를 띠지 않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그는 1989년 8월 10일자 〈롤링 스톤(Rolling Stone)〉지의 데이비드 셰프(David Sheff)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에이즈 양성 반응자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나는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나마 내가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미래를 예상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조리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면서 살고 있다”라고 진술한바 있다. 이런 점에서 동성애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80년대는 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같이 이전의 사회에서는 비정상으로 낙인 받던 소수의 성문화를 제도적으로 공인받고 정착시키려는 사회적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헤링은 이러한 사회적 운동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자신의 성을 숨기기보다는 드러내며 동성애적 문화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가지며 작업을 한 작가로는 키스 헤링 외에도 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앤디 워홀(Andy Warhol) 등이 있다. 이들은 이성애자와는 다른 시선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봤고 메시지를 담은 작업들은 대중을 의식한 작업이었다. 14

  키스 헤링은 1988년 에이즈에 감염되면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고뇌가 심해졌고 89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자선사업과 에이즈 후원을 목적으로 키스 헤링 재단(The Keith Haring Foundation) 15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헤링은 자신의 작업에서 항상 정치 사회 종교적인 측면에서 사회문화의 한 부분을 대중과 소통하려고 한 점이 그만의 독특한 양식 속에서 보여 지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키스 헤링은 자신만의 독특한 상징적 시각언어로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점을 고발하려하였고, 대중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정보전달을 위해 모호하고 어려운 그림이 아닌 쉽고 이해하기 쉬운 작업들을 많이 하였다. 지하철 드로잉을 시작으로 회화, 벽화, 조각,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보여주었는데, 캔버스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도시자체를 자신의 무대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죽기 직전 제이슨 루벨(Jason rubell)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운동장과 같은 넓은 땅에 드로잉을 하기를 원했다고 하면서 만약 안데스 공원과 같은 장소에 드로잉을 했다면 아주 훌륭히 해낼 수 있었을 것 같다고 말 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16

  키스 헤링이 자신의 낙서화의 주무대로 여겼던 뉴욕은 80년대 초엽만 하더라도 20대의 젊은 화가들이 새로운 문화를 향해 모여들었지만 여전히 70년대의 진부함 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70년대 미술가들은 좁고 한정된 미술 세계를 벗어나서 대중들과 교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전쟁, 빈곤, 환경, 인권 문제, 여권 신장 등 사회 문화에 관한 예술가의 관심이 높아졌음에도, 그들은 일반 대중과의 적절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상업 화랑과 미술관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대한 돌파구로 70년대 말부터 젊은 세대 미술인들을 주축으로 소호 미술가를 과감히 탈피하여 대안적인 예술가 공동체와 전시공간을 창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7

  이렇게 대안적인 문화로 뉴욕의 젊은 화가들은 머드 클럽(Mudd club)이나 ‘클럽57’로 더 유명했던 스튜던트 클럽(student club) 등을 통해 서로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키스 헤링도 바스키아, 제니 홀저(Jenny Holzer, 1950 – )를 비롯한 여러 낙서화가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고, 퍼포먼스에 참여하거나 쇼 18를 기획하기도 했다. 19

  키스 헤링은 당시 소극적으로 숨겨졌던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 작업들과 사회적 정치적인 부정적요소를 담고 고발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으며, 낙서라는 주변(outside)문화를 예술의 한 양식으로 대중에게 시대를 이야기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참고문헌

 
ㆍAlexandra Kolossa 저. 김율 역 《Keith Haring, 키스 헤링》 마로니에북스. 2006
ㆍH.W.젠슨 저. 김민주 외 역 《미술의 역사》 삼성출판사. 1987
ㆍBruce D. Kurtz, Keith Haring, Andy Warhol, and Walt Disney. Prestel. 1992
ㆍNorman Mailer. Faith of Graffiti. It Books. 2009
ㆍPeter Frank, Michael McKenzie. New, used & improved : art for the 80’s. New York : Abbeville Press. 1987
ㆍElisabeth Sussman. Keith Haring.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997
ㆍPeter Belsito. Notes from the pop underground. San Francisco: Last gaps. 1985
ㆍJohn Gruen. Keith Haring: The Authorized Biography. New York: Prentice Hall. 1991
ㆍ박진아〈낙서화와 키스 헤링(Keith Haring)의 회화에 관하여〉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ㆍBrendan D. Strasser. It’s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and I Feel Fine): Keith Haring, Post- modern Hieroglyphics, Panic Graffiti, and the Fun Apocalypse, and the Language of Hyperreality. Bowling Green State University. 1992
ㆍJulia Cocuzza. Keith Haring’s Subway Chalk Drawings: Graffiti’s Social Intervention of the Early 1980s. CUNY Graduate Center. 2010
ㆍ 정무정〈힙합 리듬같은 낙서화가의 삶〉월간미술. 1997. 9월호
ㆍ 이태호 〈장내미술과 장외미술〉월간미술. 1989. 4월호
ㆍ Peter Frank, Michael McKenzie New, used &improved : art for the 80’s . New York : Abbeville Press. 1987
ㆍ Keith Haring When is a painting finished. Art News. 1985. 11
ㆍ Jason Rubell Keith Haring: The last Interview Art Magazine. 1990. 9
ㆍ Pernilla Holmes. These Walls Can Talk. Art Review. 2005. 5
ㆍ 키스 헤링 재단(The Keith Haring Foundation) www.har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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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미술평론·경영 전공 1기. 2013년 2월 졸업
  2. Bruce D. Kurtz, Keith Haring, Andy Warhol, and Walt Disney pp.13-22. Prestel. 1992
  3. 반달리즘(vandalism). 도시의 문화,예술이나 공공시설 등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로서 5세기 초 유럽의 민족대이동 때 북아프리카에 독립왕국을 세운 반달족(族)이 지중해 연안에서 로마에 걸쳐 약탈과 파괴를 거듭한 일에서 유래된 말이다.
  4. Brendan D. Strasser. It’s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and I Feel Fine): Keith Haring, Post- modern Hieroglyphics, Panic Graffiti, and the Fun Apocalypse, and the Language of Hyperreality. p.55. Bowling Green State University. 1992
  5. Norman Mailer. Faith of Graffiti pp.4-5. It Books. 2009
  6. 그라피티(graffiti): 그라피티는 넓은 개념에서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적인 낙서 형태를 지칭하여 말하는데, 협소한 의미로는 지하철 낙서에서 시작한 ‘낙서화’를 가리켜 말하기도 한다. 낙서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그라피아레(graffiare)에서 유래되었는데 원시시대의 벽화나 라트리나리아(latrinalia, 목욕탕 벽의 그림) 또는 전반적인 정치적, 성적, 유머 혹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 벽을 긁거나 그리거나 표시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7.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기원전 30,000-10,000년 구석기 시대부터 석회암 동굴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회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와 북부 스페인의 알타미라(altamira)동굴 벽화에서는 동물과 사냥 장면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원시인들의 종교적 생활상의 일면이라고 짐작되고 있으나 구석기인들이 왜 동굴 벽화를 그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H.W.젠슨 저. 김민주 외 역 《미술의 역사》pp.21-24. 삼성출판사. 1987
  8. Alexandra Kolossa, 김율 역 《Keith Haring, 키스해링》p.60. 마로니에북스. 2006
  9. Keith Haring When is a painting finished. p.90. Art News. 1985. 11월호
  10. Jason Rubell Keith Haring: The last Interview Art Magazine. 1990. 9월호
  11. Alexandra Kolossa, 김율 역 《Keith Haring, 키스해링》p.64 마로니에북스. 2006
  12. Elisabeth Sussman, Keith Haring. p.20.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997
  13. 이태호 〈장내미술과 장외미술〉 p.78. 월간미술. 1989. 4월호
  14. John Gruen. Keith Haring: The Authorized Biography. p.90. New York: Prentice Hall. 1991
  15. 키스 헤링 재단(The Keith Haring Foundation) www.haring.com
  16. Jason Rubell Keith Haring: The last Interview Art Magazine. 1990. 9월호
  17. Peter Frank, Michael McKenzie New, used & improved : art for the 80’s. pp.27-28 New York : Abbeville Press. 1987
  18. 공연은 에로틱 아트(Erotic Art) 포르노그래픽 아트(Pornographic Art) 제록스 아트(Xerox Art) 익면의 예술(Anonymous Art) 이라 불려졌다. John Gruen. Keith Haring: The Authorized Biography. p.62. New York: Prentice Hall. 1991
  19. Peter Belsito. Notes from the pop underground. p.102. San Francisco: Last gaps.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