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1979년 국내 행위예술의 시기별 특징과 미술사적 의미

제8호 《Art Pavilion》수록. 2017년 11월 발행

김수인 1

1. 머리말
2. 1967-1970년: 국내 행위예술의 소그룹 활동과 해프닝

    1)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과 최초의 해프닝
    2) 1968-1970년: 3인의 해프닝과 제4집단

3. 1970-1979년: 이벤트의 논리적 사유

    1) 이건용의 로지컬 이벤트(Logical Event)
    2) 성능경, 이강소의 이벤트

4. 1967-1979년 국내 행위예술의 미술사적 의미

    1) 국내 행위예술의 탈 매체적 해석
    2) 국내 행위예술에서 내재된 개념적 요소

5. 맺음말

 

1. 머리말

 

본 연구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미술가들 자신의 몸을 ‘매개’로 사용하기 시작한 행위예술(行爲藝術, Performance) 2의 전개 과정과 그 시기별 특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행위예술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을 시작으로 크게 1967-1970년과 1970-1979년의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967년 시작된 해프닝(Happening)이 주를 이룬다. 해프닝은 예기치 않게 생긴 일이나 일상적인 현상을 낯설게 함으로써 생겨나는 예술현상을 중시한다. 해프닝에서 예술가는 직접 행위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행위자는 즉흥적인 연기와 함께 관객 참여를 유도하면서 특수한 환경을 형성한다. 두 번째로 1970년대에 발생한 이벤트(Event)는 해프닝보다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취하면서 행위 자체를 명확하게 하려고 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 행위예술은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해프닝에서 논리적 사유를 다루는 이벤트로 정착해 나갔다. 이로써 제한적이었던 기존의 예술 구조와 한계를 허물며, 다양한 의미를 수용하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리고 사적인 담론을 담기 시작한 1980-1990년대 행위예술의 확산뿐 아니라, 현재 한국 현대미술 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초기 한국 행위예술의 미술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고하여 단면적인 분석이 아닌 총체적인 흐름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1967년부터 1979년까지 국내 행위예술에서 나타난 탈 매체화 현상과 개념적인 요소를 정리하였다. 또한 최근 한국 행위예술 50주년을 맞이해 재평가 받고 있는 작가들과 비평가, 학자들의 논의를 연구, 분석하였다. 이를 통하여 한국미술계의 행위예술의 큰 흐름을 파악하고, 고유의 특성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용어사용과 범위에 있어서는 가급적 ‘퍼포먼스’라는 말 보다는 ‘행위예술’을 선택하였고, 그 범위 안에서 해프닝과 이벤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 이유는 연극에서의 퍼포먼스와 혼용되지 않는 명확한 전달을 위해서이다. 본 논문에서는 국내의 해프닝과 이벤트가 국외의 영향도 받았지만, 당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생겨난 고유한 특징에 집중하여 작품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현재 대두되고 있는 분야인 만큼 통설적인 정보들 보다는 가급적 당시 작가, 평론가, 학자 등의 다양한 입장을 수용하고, 그들의 관점을 통해 선명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2. 1967-1970년: 국내 행위예술의 소그룹 활동과 해프닝

 

1960년대를 지나면서 소위 ‘4.19 세대’에 속하는 청년작가들은 ‘탈앵포르멜’ 3이라는 공통적 연대감을 가졌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관습적인 미술 형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조형 영역을 개척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소그룹으로 결성된 무(無)동인, 오리진(Origin), 신전(新展)동인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을 개최하면서 한국현대미술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1967-1970년 사이의 해프닝은 다양한 소그룹 활동을 통해 진행되는 경향이 있었다. 실험적인 성향의 그룹 오리진, 무동인, 신전동인 등은 기존문화의 양식적 획일화를 거부하며,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오브제와 설치, 행위 등을 새로운 조형언어로서 등장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4

 

1)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과 최초의 해프닝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참여작가들의 가두시위. 1967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참여작가들의 가두시위. 1967

‘청년작가연립전’ 5은 오브제, 네오 다다, 팝아트, 옵아트, 테크놀로지 아트, 해프닝, 가두시위 등을 도입시켰다. 그리고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발표하며 예술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이용한 한국행위예술의 시작을 알렸다. 이는 탈 평면화, 탈 매체적인 특징을 띠면서,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양상을 선보였다. 최초의 해프닝 이후부터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행위예술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그 중 「한강변의 타살」이나 「문화인 장례식」은 단순히 매체의 확장을 넘어서, 기존 문화에 대한 강한 저항과 사회적 발언을 담기도 했다. 이렇듯 해프닝은 1970년까지 약 4년간 활발히 전개되었다.

불교의 무의 세계라는 뜻을 담은 무동인은 1962년에 김영남, 김영자, 김상령, 문복철, 석난희, 이태현, 최붕현, 황일지, 설영조로 구성됐다.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 활동도 있었으나, 1967년 6월 김영자, 이동복, 이태현, 최붕현 4인 전에서는 오브제를 주 매체로 다뤘다. 이들은 다다에 영향을 받은 반예술적 성향이 강했다. 1963년 오리진의 창립전이 열렸고, 서승원, 권영우, 이승조, 이상락, 김수익, 최명영, 김택화, 신기옥 등 9인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경향의 추상미술을 지향했다. 또 논꼴동인의 강국진, 김인환, 양덕수, 정강자, 정찬승이 결성한 신전동인은 퍼포먼스와 오브제, 팝아트 등에 관심이 있었다. 6

오광수 기획. 무동인과 신전동인 시연.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한국청년작가연립전’ 4:00pm. 1967.  12. 14. 중앙공보관 제2전시실

오광수 기획. 무동인과 신전동인 시연.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한국청년작가연립전’ 4:00pm. 1967. 12. 14. 중앙공보관 제2전시실

‘청년작가연립전’은 오리진, 무동인, 신전동인의 연합전시 형태로 1967년에 개최되어, 한국현대미술에 혁신을 가져왔다. 7 개막 당일에는 국내 최초의 가두행진이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젊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알리면서, 기성 미술계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최붕현(1941- )은 ‘보십시오無料入場(무료입장)’, 심선희(1944- )는 ‘抽象以後(추상이후)의 作品(작품)’이라는 피켓을 들었다. 또 강국진(1939-1992)은 ‘行動(행동)하는 作家(작가)’와 보수세력의 국전을 비판하는 ‘坐像派 國展(좌상파 국전)’이 적힌 피켓을 양손에 들었다. 8

이 외에도 ‘생활 속의 작품’, ‘현대회화는 대중과 친하다’, ‘4억의 도박 국립종합박물관’, ‘국가 발전은 예술의 진흥책에서’, ‘현대미술관이 없는 한국’등의 문구로 미술계를 비판했다. 이러한 피켓행진은 미술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였고,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개막 3일 후, 12월 14일에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발표됐다. 오광수(1938-
)가 기획하고, 무동인과 신전동인 작가들이 시연한 한국 최초의 행위예술이었다. 순수 정신을 상징하는 촛불을 핵우산(또는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비닐우산과 대비시켰다. 작가들은 비닐우산을 망가뜨리면서 문명을 비판하고자 했다. 9

비닐우산을 든 김영자가 최봉현의 「색 연통」에 앉았고, 무동인 멤버들은 그 주위에 모서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말아 녹두꽃이 떨어지면…” 하고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며 돌다가 우산의 비닐을 촛불로 태운다. 10 김영자가 일어나 함께 원을 그리며 돌다 다시 앉으면, 나머지 작가들이 달려들어 촛불을 끄고 비닐우산을 찢으며 짓밟는 행위를 하였다. 작가들은 김영자의 주위를 돌 때, 최붕현의「색 연통」의 연통을 피하기 위해 몸을 굽혀 움직이며 리듬감을 만들었다.

이로써 전시 작품과 행위와의 연관성이 드러나며, 동시에 해프닝의 현장성을 살렸다.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제목에 ‘해프닝’을 포함시키고, 작품에서 부른 곡조차 즉석으로 정하는 등 즉흥성과 우연을 강조하며 앞으로 전개될 해프닝을 예고했다. 11 앞서 언급된 오리진, 무동인, 신정동인 세 그룹의 ‘청년작가연립전’은 한국 미술계에서 최초로 ‘행위’와 ‘설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주요한 전시라 볼 수 있다.

 

2) 1968-1970년: 3인의 해프닝과 제4집단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 이어서, 작가들은 더욱 실험적인 작업들을 시도했다.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는 강국진(姜國鎭, 1939-1992), 정강자(1942-2017), 정찬승(鄭燦勝, 1942-1994) 3인의 해프닝 작품과 제4집단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그룹 안팎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청년작가연립전’ 작가들은 서울 쎄시봉 음악 감상실에서 제3회 세미나 12 ‘현대미술과 해프닝의 밤’을 오광수의 강연과 함께 열었다. 제3회 세미나에서는 상파울루 및 파리 비엔날레 영상과 작가들의 작품이 슬라이드 쇼로 전시됐으며,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해프닝이 있었다. 여기서 벌인 「색 비닐의 향연」과「화투놀이」는 두 번째 해프닝이다. 13

「색 비닐의 향연」은 비닐과 물의 사이에서 각양각색의 색소들이 율동감을 만들어 조화를 이루다가, 색의 율동들이 과열되면서 비닐들이 터지고 색소 물이 사방으로 튄다. 작가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조화와 파괴가 부딪히면서 오는 새로운 미의 현상을 발견하고자 했다.

「화투놀이」는 일상의 여가 속 사건을 보여주며, 현대인의 억압된 욕망과 권태를 표현했다고 한다. 14 여기서 예측 불가한 비논리적인 행위가 진행될 때, 사건을 이어주는 주제는 포커나 블랙 잭, 혹은 마작이 아닌 한국에서 흔히 하는 소집단 게임 화투놀이이다. 15 「색 비닐의 향연」과 마찬가지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예술의 새로운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한강변의 타살」 ‘청년작가연립전’ 1968. 10. 제2한강교 아래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한강변의 타살」 ‘청년작가연립전’ 1968. 10. 제2한강교 아래


 

신전동인을 결성하고 ‘청년작가연립전’을 함께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은 1968년 10월 17일 「한강변의 타살」을 발표한다. 「한강변의 타살」은 ‘청년작가연립전’의 세미나와는 별도로 야외 해프닝으로 제2한강교 아래서 펼쳐졌다. 모래사장에 웅덩이를 만들어, 작가들은 스스로 몸에 비닐을 두른 채 땅에 파묻혔다. 사람들은 그 위에 물을 붓거나 물총을 쏘았다. 이들은 다시 웅덩이에서 나와 ‘문화실명자’, ‘문화 기피자’, ‘문화 사기꾼’, ‘문화부정축재자’, ‘문화곡예사’등의 문구가 적힌 비닐을 쓰고 관중에게 낭독하며, ‘죽이고 싶다, 모두!’하고 외치며 모든 것들을 태워 매장시키는 행위를 했다.

작가들은 자신의 몸을 오브제로 이용하면서 자학하고 비닐을 태우는 등의 격정적인 표현을 취하며 미술계에 반항했다. 이는 한국에서 보이지 않던 새로운 방식이었다. 따라서 「한강변의 타살」은 탈 평면이라는 매체의 확장을 넘어서, 기성 미술계의 문화적 모순을 강하게 고발하는 사회성을 띠었다.

정강자 「투명풍선과 누드」 8:30 -10:00pm. 1968. 5. 30. 쎄씨봉 음악감상실

정강자 「투명풍선과 누드」 8:30 -10:00pm. 1968. 5. 30. 쎄씨봉 음악감상실

이들 3인은 1968년 5월에도 음악 감상실 쎄시봉에서 한국 최초의 누드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를 진행했다. 한국청년작가연합회가 ‘환경미술의 공동현실’이란 주제로 제4회 현대미술세미나를 가졌는데, 바로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16 정찬승은 “누드 해프닝은 이브 클렝(Yves Klein, 1928-1962)이 먼저 했지만 우리도 해보자”고 제안했고, 의논 끝에 만들어진 각본은 음악, 빛, 행위가 결합하면서 해프닝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해프닝은 여성이 국내 최초로 옷을 거의 벗었다는 점에서 대중매체의 상업주의적 주목을 받아 화제였다. 17

앉아있는 정강자의 나체에 관객들은 각자 만든 일명 본드를 빨대로 분 투명 풍선(일명 모던 풍선)을 들고 나와 붙인다.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면, 모두가 달려들어 풍선을 거칠게 눌러 터트렸다.

최초의 해프닝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에서도 김영자는 우산을 든 중심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여성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투명풍선과 누드」는 여성이 직접 프로젝트에서 스스로 주연을 맡았으며, 여성의 몸을 성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은 채 적나라하게 드러낸 첫 해프닝이었다.

몸을 뒤덮던 투명풍선은 연약하게 모두 터져 버리고 여성의 신체만이 남겨졌다. 고루하다는 평가가 있었음에도, 「투명풍선과 누드」가 쏟아지는 광선과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서 행위자의 몸과 참여하는 관객이 통합된 총체적 해프닝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24초의 의미」 안내장 겉 표지. 1969

「1/24초의 의미」 안내장 겉 표지. 1969

한편, 이 무렵 김구림과 김차섭은 「매스미디어의 유물(遺物)」이라는 메일 아트를 실행했다. 〈주간경향〉과 〈선데이 서울〉과 같은 주간지에서는 “우편을 새로운 표현의 통신수단으로 인식하고, 수신인이 참여하는 공동제작 방식, 물·불·공기·거품·냄새까지 동원해 작품영역을 확대해가겠다”는 혁신적인 발상이라며 소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김구림은 한국 최초의 전위영화 「1/24초의 의미」와 「무제」, 「콘돔과 카바마인」을 정찬승, 최원영, 반대규, 정강자 등과 함께 발표했다. 18 그러나 ‘환경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된 「1/24초의 의미」는 영화계에서 ‘영화잡지’에 소개되었지만 메이저 화단에서는 언급되지 않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

김구림과 정강자 「무제」 1969. 7. 21. 영상 및 퍼포먼스. 아카데미 음악실

김구림과 정강자 「무제」 1969. 7. 21. 영상 및 퍼포먼스. 아카데미 음악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림의 작업은 신체와 공간, 영상 등을 결합시키기 시작한 중요한 시도임이 분명하다. 김구림은 「1/24초의 의미」를 7월 21일 아카데미 음악실에서 상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영사기 문제로 상영이 불가해, 흰색 타이즈 의상을 입고 정강자와 함께 직접 스크린이 되어 몸에 「1/24초의 의미」의 슬라이드 이미지를 투사시키는 행위를 벌였다. 이 작품이 김구림의 행위예술 작품 중 하나인 「무제」이다. 이러한 김구림과 해프닝 미술가들과의 공동 작업은 일회성의 사건에 머물던 해프닝에, 기존 회화나 조각 장르의 경계를 넘어 각 예술 장르가 종합되는 총체예술로서의 의미까지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20

그리고 1970년 6월 20일 김구림을 대표로 제4집단이 탄생했다. 그들은 영상매체를 활용하고 음악을 사용하는 등의 매체 통합적인 방식의 영향을 받았다. 21 김구림, 정찬승, 정강자, 강국진, 최붕현, 방거지, 강석희, 석야정, 김벌래 등 총 16명으로 구성된 제4집단은 그 활동 분야가 미술, 연극, 패션, 음악, 영화, 종교계 등을 총망라하는 반체제적 행위미술의 아지트이자 공동체였다. 그들의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 22

-우리는 인간을 본연으로 해방한다.
-우리는 순수한 한국문화의 독립이 세계 문화의 주체임을 확인한다.
-우리는 참여로서 모든 체제를 통합한다.
-우리는 무체로서 일체를 이룬다.

제4집단의 예술 사상은 무체주의(無體主義)로 노자 사상의 핵심인 지배 의욕을 버리고 무위자연에 의해 지배하려는 정치사상에서 가져와, 형체가 없는 ‘무체예술’을 추구했다. 23 ‘무체’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오던 사고를 떠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을 예술 차원으로 일체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환영받지 못했다. 정찬승과 연극배우 고호를 중심으로 억압된 현대 인간의 소외를 보여주는 1970년 「가두 마임극」은 명동에서 경찰에 연행됐고,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역시 거리에서 기성문화예술을 비판하다 도로 교통법 위반으로 영등포 구치소에서 즉결재판을 받았다. 또, 사회의 혼돈 상황을 고발하려던 「무체전」역시 개막 날 폐쇄되었다.

이들의 작품이 등장한 시기는 백남준(1932-2006)과 샬롯 무어맨(Charlotte Moorman, 1933-1991) 및 앨런 캐프로(Allan Kaprow, 1927-2006)의 해프닝의 보도와 1960년대 미국 학생들의 반체제 운동에 관한 서울 미국문화센터에서 심포지엄이 열린 후임에도, 폐쇄적인 사회 속에서 한국의 행위미술은 제대로 해석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것이다. 24

「전위가 뭐 길래 알몸의 남녀가」 〈선데이 서울〉 1970. 8. 23.

「전위가 뭐 길래 알몸의 남녀가」 〈선데이 서울〉 1970. 8. 23.

1970년에 결성된 제4집단으로 인해, 비로소 한국의 행위미술은 집단화 경향을 보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제4집단은 미술계에서주로 사용하던 협회나 동인이라는 표현대신, 집단이라는 용어에 한국 사회에서 통념적으로 꺼리는 숫자4를 합쳐 제4집단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해프닝을 전면적인 표현 양식으로 내세웠다. 25

제4집단은 우발적, 충동적, 퇴폐적이며 지나치게 난해해 사회 변화 의지를 예술 형식에 내재화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의 작업은 근본적인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26 하지만 근래에 들어 제4집단을 대중문화적인 요소를 도입한 전위적 행위로 순수예술에 대항한 청년 예술단체로 분석하기도 했다. 27
그들은 총체예술 집단으로서, 행위예술을 통해 삶의 변화를 추구하였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28

하지만 당시 주 언론 매체에서는 이들의 예술을 가십성 기사와 오락거리로 제공하며 선정적인 퇴폐문화로 인식시켰다. 주간지는 제4집단의 전위미술에 대해 “인체를 얽어놓고 무체라니 웬 말”이라는 소제목으로 조롱하거나, “작품보다 옷을 잘 벗는 정강자가 푸짐한 해프닝쇼를 마련했다”며 여성작가를 성적 대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의 해프닝이 전위예술인지 전위란 이름의 장난인지”라는 문구로 작가들의 예술 의지를 부정했다.

이와 같은 기사로 인해, 예술가들은 정부에 의해 퇴폐라는 반윤리적인 존재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해프닝의 개념에 혼란을 야기했다. 결국 1970년 제4집단은 아주 짧은 활동으로 해산되었다. 국내 미술계의 행위예술은 잠시 공백기를 가졌다.

 

3. 1970-1979년: 이벤트의 논리적 사유

 

1970년대에는 그룹 창립전이 연이어 있었는데, 1970년 ‘A.G.전’, ‘신체제전’, 1971년 ‘S.T.전’, 1972년 ‘에스프리전’ 등이다. 특히 ‘A.G.전’과 ‘S.T.전’은 제한적인 공간을 구성하거나 완결을 위한 작업 등을 통해 완성된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사회 참여적인 초기의 반체제적 성향의 행위예술과 달리, 그룹 A.G.(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1969-1975)와 S.T.(Space&Time, 1971-1981)에서는 미술 내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들은 논리와 개념을 통한 장소성이나 시간성을 중점적으로 모색하였다. 29 이를 바탕으로 이건용(李建龍, 1942- ) 30, 성능경(成能慶, 1944- ), 그리고 이강소(李康昭, 1943- )는 그룹 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이벤트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이벤트를 이건용, 성능경, 그리고 이강소를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1) 이건용의 로지컬 이벤트(Logical Event)

 

A.G.와 S.T.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공간적인 상황 그 자체를 표현하고자 하여 시간성과 장소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바로 A.G.전과 S.T.전에서는 공간을 구성하거나 오브젝트(Object)를 제작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그 자체로 드러내는 장소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 31 이에 따라 논리와 개념을 중요시하면서, 논리적 사유로의 이벤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 S.T.는 관념적인 것을 강조했던 A.G.에 비해 학술성을 강조했는데, 32 바로 코수스(Joseph Kosuth, 1945- )의 ‘철학 이후의 미술’이나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새로운 예술론의 준비를 위하여’등을 이론적 바탕을 두었다.

특히 이건용은 1975년에 ‘오늘의 방법전’ 오프닝에서 「이벤트-현신(現身)」이라는 제목으로 「동일 면적」과 「실내 측정」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이 행위미술을 ‘이벤트’라 부르기 시작했다. 33 그는 예술가의 몸을 주변의 상황(환경)과 장소, 언어와 매개하는 장으로 보며 본격적으로 이벤트로의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에서 그는 동일한 면적을 여러 번 재면서 동일 행위를 반복했다. 그의 이벤트는 이전 세대에 있었던 해프닝과의 차별성이 강조되는 이벤트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34

해프닝은 행위의 우연성을 통하여 질러지는 어떤 사태의 표출과 그에 대한 물음으로 특징되는데 반해 「이벤트」는 처음부터 행위의 우연성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연성은 궁극적인 행위에서 드러나야 할 효과라고 생각되지만, 행위자체가 벌써 어떤 규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어요. 그러한 한 이 규정하는 거의 본질 즉 논리를 행위 가운데서 찾아본다든가 또 그 반대로 어떤 논리에 의해서 행위를 전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35

이건용은 해프닝과 이벤트를 구분하는 특징을 ‘행위의 우연성’으로 봤는데, 이는 1950-1960년대 서구에서 유래한 용어로써의 해프닝과 이벤트와는 그 쓰임의 차이가 생긴다. 미국의 앨런 캐프로(Allan Kapro, 1927-2006)는 해프닝을 작가의 의도와 계획 속에 즉흥적 요소를 지닌 시각예술과 행위가 결합한 일종의 종합예술로서 1959년 마크 루벤 갤러리(Mark Reuben Gallery)에서 선보인 개인전 「6부분으로 나누어진 18개의 해프닝(18 Happenings in 6 Parts)」에서 처음 사용했다. 36

그리고 이벤트는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와 그 제자들인 플럭서스(Fluxus) 작가들이 그들의 음악적 행위예술을 특정 짓기 위한 데서 유래했다. 37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 1926-2008)가 플럭서스의 영향을 받아, ‘이벤트’라는 용어를 1959년 「이벤트 악보(Event Score)」「세 개의 의자 이벤트(Three Chair Event)」등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38 플럭서스의 이벤트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짧고 단일한 구성을 지니는데 반해, 해프닝은 시각예술과 행위가 결합한 종합예술로 해프닝과 이벤트 모두에서 ‘작가의 계획’과 ‘우연성’이라는 특징이 드러난다. 39

따라서 이건용이 언급한 해프닝과는 차별화된 이벤트에 대한 설명은 서구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건용이 정의한 이벤트는 1960년대 말 한국에서 발생했던 우연성을 거부한 행위예술이다. 또한 이건용이 언급한 해프닝의 정의는 1960년대 모든 행위미술을 포괄하는 것이 아닌, 「가두마임극」과 같은 제4집단의 일부 행위를 제한적으로 둔 것으로 보인다. 40

이건용은 1975년 10월 6일 이벤트「건빵먹기」를 발표하면서 4가지 행위를 했다. 건빵을 먹다가 손목에 깁스를 하고, 다음은 팔꿈치까지 깁스를 한다. 그러면 이제 건빵이 먹기 힘들어진다. 다시 가슴까지 깁스를 하면 허리까지 굽혀 건빵을 집어먹어야 한다. 이건용의 어려운 ‘건빵먹기’ 행위는 신체의 구속을 통해 사회적, 정신적 구속을 암시하고 있었다. 41 이후 이 작품은 2016년 현대갤러리에서 재현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벤트에 ‘로지컬(논리적)’이라는 단어를 더하면서 해프닝에서 이어온 이벤트적 성격과 개념적 분석 및 논리성을 추구했다. 이건용의 로지컬 이벤트(Logical Event)에서는 예술가의 몸, 그 몸이 주변 장소(공간)과 갖는 관계성에 주목했다. 특히, 이건용은 나를 세상의 주체로 보고 세상을 원근법적 시각으로 바라보던 서구의 관점에서 벗어나, 내가 움직이면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시차적 관점을 이용했다.

이건용 「장소의 논리」 1975. 퍼포먼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S.T.전

이건용 「장소의 논리」 1975. 퍼포먼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S.T.전

그 예는 1975년 홍익대학교 운동장에서 진행했던 이벤트 「장소의 논리」이다. 42그는 운동장에 둥근 원을 그린다. 그리고 그 앞에서 원의 중심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거기’하고 외쳤고, 원의 중심에 들어가서는 ‘여기’, 원 밖으로 나가서 다시 뒤에 있는 원을 향해 ‘저기’라고 외치는 행위였다. 43 원은 그 자리 그대로 있으나 나의 몸의 위치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라는 논리적 기호를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몸의 위치와 언어는 주변의 상황을 조건 짓는 가변요소로 변해간다. 44

이러한 작업은 1979년 제15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진행된「달팽이 걸음」으로 이어진다. 그는 성능경의 집에서 호수 해변을 찍은 사진첩을 보다가 곤충이 모래 위를 천천히 기어가면서 남긴 자국을 찍은 사진에서 달팽이 걸음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이건용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 1979

이건용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 1979

이건용은 쭈그리고 앉아 분필로 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동시에 발로 그렸던 분필 선을 지움으로써 시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행위자는 그림을 그리면서 주체화되고, 동시에 자신이 그리는 것을 무화시키면서 타자화 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두 행위는 계속해서 교차되어 만난다.

무엇보다 이건용의 행위는 나의 관념과 선입견이 생기기 이전에 존재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과정을 중요시했다. 또 정강자와 초기 한국 행위 예술가들의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예술적 특징과 달리, 이건용의 로지컬 이벤트는 장소와 공간이 갖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예술가의 몸을 타자화 시키면서 사물과 언어를 이어주는 매개체적인 역할을 수용하였다.

 

2) 성능경, 이강소의 이벤트

 

1974년 ‘제3회 S. T.’에서 성능경은 1970년대 이벤트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를 발표했다. 3개의 판넬을 전시 벽면에 위치시키고 신문을 핀으로 부착시킨 다음, 전시기간 중 동아일보의 사진과 광고 및 만화를 뺀 모든 기사를 매일 오려 따로 담는 행위였다. 앙상한 행간란 만이 전시됐다. 그는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신문의
이강소 「화랑 내 술집(소멸)」 1973. 명동화랑
기능을 의심했다. 45

이강소 「화랑 내 술집(소멸)」 1973. 명동화랑

이강소 「화랑 내 술집(소멸)」 1973. 명동화랑

이강소는 ‘A.G.전’에 참여해 갈대를 콘크리트에 심은 후, 전시장에서 사람들이 그 사이를 걷게 하며 관람자들이 작품 안에서 존재하게 했다. 그는 이후 행위예술 작업보다 조각과 회화에 매진했으나, 1973년 김문호가 이끌던 명동화랑에서 「화랑 내 술집(소멸)」을 진행했다. 형식에 관해서는 해프닝과 이벤트의 방법적 형식을 빌려왔다.

하지만 과거 한국 초기 행위예술에서 작가 스스로의 몸을 사용하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작가 자신의 몸을 탈주체화 시키기 위해 관람자로 숨어버린다. 이로써 작품의 의미가 전시장에서 완성될 수 있도록 한다. 그동안 예술가를 주체로 보고, 관람자를 객체로 봤던 전통적 경계나 위계를 상당히 전복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그의 작업은 술을 마시는 일상적 행위가 어디까지 평범한 행위이고 예술적 행위인지, 또 예술가의 프로덕션과 관람자의 소비(술을 사서 마시는 행위)를 가르는 경계가 어디인지 자문하게 했다. 이강소의 작업은 개념적 행위예술의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 받을 만하다. 46

이와 같이, 작가의 존재를 숨김으로써 관객을 주체화 시키는 이강소의 또 다른 작업으로 「무제 75031」이 있다. 작가는 퍼포먼스의 수행성을 의도하기 위해, 나무, 석고, 돗자리, 끈, 철 등이 흩어져 있는 원형에 닭을 풀어놓았다. 통제할 수 없는 닭의 움직임은 제9회 파리비엔날레를 위해 기획되었고,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연되기도 했다. 비엔날레라는 공간에 컨트롤할 수 없는 닭은 당시 현대미술에 익숙한 파리 관람객들에게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1970년대 이벤트를 이건용과 함께 이끈 성능경은 S.T.의 멤버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행위미술가로 사진, 설치, 연극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특히 성능경은 한국에서 첫 개념사진을 시도했다. 행위예술과 사진을 통한 개념성 추구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언어를 구축한 것이다. 1970년대는 성능경의 주요 작업들 -논리적 사진작업, 신문작업, 행위, 개인사 도큐먼트 등이 사실상 모두 이루어진 중요한 시기이다.

앞서 언급했던 성능경의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는 10여 년간 지속되는 그의 신문작업에 대한 모태가 된다. 47
이건용의 이벤트가 발표된 1975년보다 한 해 앞서 작품으로 행위에 논리적 측면과 개념성을 최초로 도입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성능경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 ‘S. T.전’

성능경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 ‘S. T.전’

작품이 발표된 당시 시대적 배경이 유신시대의 언론탄압이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회 참여적 미술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신문이라는 매체의 성격, 시간의 경과와 함께 휴지가 되는 뉴스의 속성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개념미술로 일어난 사건과 편집된 정보 사이에서 생겨나는 신문 본래의 허구적 성격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 48

신문이라는 일종의 ‘레디메이드’를 선보이고, 매일 지속적으로 신문을 교체하며 전시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이미지와 텍스트를 원래의 맥락에서 편집해 자료 형태로 제시하는 등 개념미술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성능경은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와 같이 작품세계에 개념적 탐구가 집약적으로 들어있는 작품을 이후로도 계속 발표했다. 이후 사진을 통해 개념적 탐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개념미술에서 사진은 작가의 표현을 위한 도구이면서 개념의 확장까지 가져온다. 49

이와 같이, 주요 이벤트 작가인 이건용과 이강소, 성능경은 각자의 개념으로 전위적인 작업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한국 현대미술이 이루어낸 매체의 확장과 무한한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70년-1979년은 로지컬 이벤트 등의 작업들을 통하여 다소 과격하고 산발적이었던 1960년대의 도전적인 해프닝보다, 개념적인 특징들을 더 드러내면서 국내 행위예술이 정착되는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4. 1967-1979년 국내 행위예술의 미술사적 의미

 

1960년대 국내 행위예술은 ‘완결된 작업으로서의 생산성 예술을 거부하는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행위예술은 예술가들 자신의 신체를 표현 매체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회화양식과 다르다. 따라서 작품은 신체, 공간, 그리고 시간이 예술가의 의도와 함께 엮여 실질적인 상황으로 드러나면서, 결과가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50

무엇보다 초기 한국행위예술은 예술의 사회성을 불러일으키는 반항적인 신념들이 파격적인 행위예술로 나타나면서 매체의 확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작가들은 소그룹 안에서 혹은 각자의 활동을 통해 각기 다른 개념들을 선보이며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성을 키웠다. 이에 따라 드러나는 탈 매체적 특성과 개념적인 요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한국행위예술의 탈 매체적 해석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초기 해프닝 작가들은 미술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왔던 캔버스라는 매체에서 벗어나, 신체를 예술적 행위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신체는 사랑과 미움, 쾌락과 번민, 왜곡과 편견, 그리고 질병과 죽음이 등재된 생물학적인 존재로써, 때로는 이념이나 정책 등의 정신적인 요소를 드러내기도 한다. 행위예술가들은 이러한 자연적인 신체의 작용을 예술적인 요소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51

행위예술은 또 작가의 몸을 포함한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주제를 표현한다. 1967년 12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에서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등장하며 사회문명을 비판하였고, 1968년 「한강변의 타살」에서는 비닐과 물총, 그 밖에 환경적 요소를 이용하며 미술계의 문화적 모순을 주장하였다.

연극 52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계속해서 반복될 수 있지만, 행위예술은 공간과 관객, 그리고 작업으로서의 변형이 1회라는 시한성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행위예술의 특징은 이강소가 1973년 명동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에서 진행된 「화랑 내 술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53

선술집의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놓고, 명동의 실제 낙지집 간판까지 옮겨 놓았다. 화랑(전시 공간)을 선술집(일상적 공간)으로 변신시켰다. 또한 이는 관람객이 주어진 전시공간을 직접 체험하도록 해, 일종의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적 면모를 더욱 강하게 보인다. 「화랑 내 술집」은 관객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한다. 같은 장소와 시간에 다시 설치한다고 해도, 관객과의 상호 작용으로 진행되는 행위예술이기 때문에 똑같은 재현이 불가하다고 볼 수 있다. 54

행위예술은 신체, 행위, 의상, 소품, 공간, 텍스트 등 물질적, 비물질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었다. 캔버스나 조각과 같이 특정한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거나 매체를 통해 소통을 이루는 예술 형태와는 다르다. 행위예술은 행위 자체와 그것을 수용하는 행위가 ‘지금’이라는 시간 그리고 ‘여기’라는 공간에서 실재적으로 발생해야 한다.

이는 캔버스나 필름과 같은 특정하고 단일한 구성요소로의 ‘매체(medium)’가 아닌 복합적이고 혼성적인 예술의 메커니즘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른바 ‘탈 매체적’인 성향은 즉물적이기보다는 개념적이고, 결과물보다는 과정이 중요시되며, 평면적인 전시 형태가 아닌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담론으로서의 미술 행위를 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초기 행위예술가들은 ‘신체’를 ‘매체’ 그 자체로 인식하며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여겼다. 하지만 정강자를 비롯한 여성 행위예술가가 등장하는 경우에는 ‘예술가의 몸’이 아닌 ‘여성의 몸’으로 인식했다.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는 여성 행위예술가들을 전통 매체로 복귀시키기도 했다. 55

1960년대 후반 김구림과 정강자의 「무제」에서는 타이즈를 입은 남녀의 몸 위로 영상이 비친다. 여기서 행위자의 인체는 스크린 표면으로 등장하였다. 영상과 행위는 하나의 작품이 된다. 또 김구림의 「무제」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보여줬는데, 그들의 인체 역시 스스로 스크린의 역할을 함으로써의 관객을 몰입시켰다. 56 이 작품들은 신체에 대한 개념 즉 역할을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성능경의 1970년대 대표작 「신문」시리즈는 57 신문 등의 오브제를 통해 사건과 기억을 왜곡하는 당대 언론 검열 방식을 행위예술로 표현했다. 오려진 신문들은 하루 동안 전시되고, 다음날 새로운 신문으로 행위가 반복된다. 여기서 작가의 행위, 사진, 오브제 등은 ‘매체’가 아닌 ‘장치’로 인식될 수 있다. 전시되는 신문과 공간, 그리고 관객의 반응 등을 포함하는 유기적인 개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치’를 이루는 구조적인 부분들은 다원적이고 다차원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이 한국행위예술에서의 탈 매체적인 맥락은 ‘매체’가 물질적 기반으로부터 멀어져 보다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상호 교류를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매체의 표면으로부터 미술관의 공간으로, 제도적인 틀로부터 담론적인 네트워크로 그 영역을 전환시킨 것이다. 58 이로써 한국 초기 행위예술은 정확한 정체성보다 가변적인 관계의 역동성을, 개인의 무의식 탐구보다 사회적 역동성의 수행으로써 새로운 사유와 도전적인 실험 미술을 펼치면서 매체의 확장을 가져왔다.

 
 

2) 국내 행위예술에 내재된 개념적 요소

 

1967년 한국 현대미술의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청년작가연립전’에서는 다다적인 경향이 짙은 일상적인 오브제전이 있었다. 작가들은 일상적인 사물을 통해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청년작가연립전’ 전시장에서 설치, 오브제, 해프닝 등의 개념적인 작품이 전시되기 시작한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렇듯 물질과 비물질적인 요소의 복합체인 행위예술은 시공간적 ‘실재’, 신체와 장소와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발생시키는 ‘실재적인 모임’이다. 따라서 행위예술은 특정한 결과물에서 벗어나려는 현대미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59 이러한 현상은 개념미술의 요소와도 함께한다.

이러한 행위예술의 개념성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1969년 김구림과 김차섭의 메일아트이다. 우편수단을 이용해 세 통의 편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우송했다. 첫 번째 편지는 두 사람이 다른 장소에서 보낸 것인데, 빨간색과 검은색의 두 개 지문이 찍혀 있는 각각 한 통씩 두통의 편지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각기 찢어진 부분의 지문이 맞추어져 한 장의 종이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 편지에는 “귀하는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1일 전에 감상하셨습니다.”라는 인쇄물이 담겼다.

당시 오광수는 이러한 행위를 두고 “하나의 행위가 끝난 후, 그것이 관념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가장 큰 특징은 우편물을 받은 사람의 참여로 인해 서로의 관념이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60년대 한국행위예술은 일상성의 의식화에서 출발하여 행위를 통해 관념을 교류하는 비물질화 현상까지 보여줬다. 60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적 반개념으로서 우연성을 지닌 해프닝은 조금 더 논리적인 일관성을 지닌 행위예술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술을 철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고, 개념미술의 수용에 따라 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초반부터 약 10여 년간 지속한 S.T.그룹에서 개념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적 미니멀리즘이 개념 미술과 동시대 현상으로 공존했는데, 미니멀리즘에서 파생했던 미국의 개념미술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구의 개념미술이 역사, 사회, 문화적 환경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개념 미술 형태의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은 다소 맥락 없이 수용되었다. 61

이건용을 포함한 S.T.회원들은 서구 미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지만,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토론과 연구를 통해 한국적인 정체성을 찾고자 한 것이다. 62 제2회 S.T.전시에서는 물성 탐구가 주된 내용으로 입체, 회화, 오브제를 다뤘다. 또 전시와 함께 코수스의 ‘철학 이후의 미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건용이 영향을 받은 코수스의 예술론은 미술의 언어학적 탐구를 통해 미술의 사고 시스템 자체를 미술의 본질로 여겼다.

이건용의 ‘이벤트’는 일상생활의 행위들이 내용이 되는데, 이를 낯선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끔 한다. 반복적이고 계획적인 논리적 행위 때문에 일상의 행위는 ‘로지컬 이벤트’가 된다. 그는 논리를 통해 그 자체를 즉물화 시키면서도 사회적인 의미로 확장시킨다. 이건용은 우연적인 해프닝보다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전개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63앞장에서 언급한 성능경 역시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발표 후 이론적 바탕으로 개념성을 구축하여 개념 사진과 개념적 행위 이벤트를 선보였다. 64

이건용과 성능경은 무목적성의 반복 행위를 ‘사건화’ 하여 이벤트의 확장된 개념으로서 신체 드로잉과 개념적 사진 설치로 발전시켰다. 한국행위예술에 나타난 개념적 요소는 서구의 것과 차이가 있으나,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5. 맺음말

 

연구자는 1967년에서 1979년까지의 국내 행위예술을 살펴보면서 해프닝에서 이벤트로의 전개 과정 및 특징과 그 미술사적 의미를 분석하였다. 이 시기의 국내 행위예술은 다소 산발적이고 일시적으로 존재했지만, 1980-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이 형성되기에 중요한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초기 국내의 행위예술은 당대의 경직된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예술의 사회적 시의성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이의 출발점은 해프닝이었다. 당시의 청년 작가들은 여러 소그룹을 결성해 활동하면서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언론매체들이 제4집단의 활동을 여러 가십성 기사와 오락거리로서 제공하였다. 이에 제4집단 작가들은 정부에 의해 반 윤리적인 존재로 낙인찍혔고, 해프닝의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 1970년대 이벤트가 등장하기 전 국내 행위예술은 한동안 위축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벤트 작가들은 1960년대 한국행위예술 초반의 해프닝과는 차별화된 독자적인 영역을 갖으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서구의 이벤트나 해프닝, 1950년대부터 이어오는 일본 전위미술의 이벤트와도 다른 변별성을 지녔다. 그들은 ‘행위’와 ‘신체’를 화두로 다양한 신체적 표현으로의 미술을 선보이며, 탈 매체적 특성을 띤다. 주로 S.T.그룹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던 이벤트 작가들은 이벤트를 위한 그룹을 따로 형성하지는 않아 그 집단적인 특성을 살피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벤트의 개념성을 보여주는 이건용의 로지컬 이벤트는 몸의 수행성을 강조했던 1960년대 후반 행위예술과 달리, 작가 스스로 타자화된 신체를 매개화하였다. 장소, 언어 등을 묶어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이는 이전까지의 해프닝, 즉 행위예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강소의 작품 「화랑 내 술집」 역시 동시대에 탈 물질 퍼포먼스를 주장했던 이승택 못지않게 실험적 행위가 지니는 개념성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1970년대 미술가들은 A.G.와 S.T.를 통해 학술적 연구도 함께 했으며,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개념미술을 발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한국행위예술은 초창기 해프닝에서 이벤트까지의 과정에서 다양한 영역과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논리적인 개념성을 확보해 나갔다. 또한 미술의 매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의 사회학적, 문학적, 미학적 영역으로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1967년-1979년 한국미술계의 시대적 환경은 작가들의 반항심과 열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들의 예술적 행보는 파격적이었고 충분히 주목된다. 따라서 이러한 몸의 역사는 한국미술계의 방향에도 이어지므로 당대 행위예술의 형상 연구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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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진 〈[제4집단]사건의 전말-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미술사학보》 미술사학연구회. 2013. 서울
․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연구 -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홍익대학 석사논문. 2017
․ Hal Foster, Hal.,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and Benjamin H. D. Buchloh., Art Since 1900 : Modernism, Antimodernism, Postmodernism, Thames & Hudson, 2005
․ RoseLee Goldberg, Performance Art : Futurism to the present, Thames and Hudson, 1988
․ 아르코 웹진 www.arko.or.kr/webzine_new/sub1/content_4209.jsp
․ 윤진섭 〈실험과 도전의 전사들〉《한국행위예술 50주년 기념 자료전》 2017

[Abstract]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Performance Art and the Art Historical Meaning From 1967 To 1979

KIM SOO-I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development process of performance art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period in which Korean artists began to use their bodies as ‘mediators’ in contemporary Korean art. In Korean contemporary art, performing art can be divided into two periods, 1967-1970 and 1970-1979, beginning with the 1967 ‘Young Artists Alliance’.

First period is mostly about the happening which began in 1967. Happening emphasizes art phenomena that arise from unexpected accidental or unfamiliar everyday phenomena. In the happening, artist becomes the subject of direct action. And actors form special environments by inducing audience participation with improvisation. Event that arose in the 1970s attempted to clarify the behavior by taking a more conceptual and logical approach than happening.

  From 1967 to 1979, Korean performance art settled as an event dealing with logical reasons in challenging and experimental happening. In this way, the existing art structures and limitations which were limited were broken down and a new chapter was opened to accept various meanings. In addition to the proliferation of performing arts from 1980s to 1990s, which began to include private discourses, it became the basis of the formation of Contemporary Korean Art.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reconsider the significance and value of art history of early Korean performance art and understand the overall flow, not the cross sectional analysis.

  In this thesis, from 1967 to 1979, this study has summarized the phenomenon of democratization and conceptual elements in Korean performance art. In addition, the study analyzed the discussions of artists, critics and scholars who have recently been reevaluated for the 50th anniversary of Korean performance art. Through this, speaker tried to grasp the flow of the performance art in the Korean Contemporary Art World and to give an opportunity to look at the characteristic of the essence of the art work.

  As far as the use and scope of terms are concerned, we chose ‘performance art’ rather than ‘performance’, and used the terms ‘happening’ and ‘event’ within the scope. The reason is for clear delivery that is not mixed with performance in drama. In this paper, although the happening and events in Korea have been influenced by foreign countries, the emphasis was on understanding the essence of the work by concentrating on the unique characteristics created by the social environment of the time. As it is the field that is emerging at present, I tried to embrace the various positions of writers, critics, scholars, etc. as much as possible, rather than conventional information, and to develop clear contents through their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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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미술평론경영 전공 석사2기
  2. 행위예술(行爲藝術, performance)은 퍼포먼스라고도 불리며, 미술가의 신체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 1960년대부터 미술가들은 각자 ‘해프닝(Happening)’과 ‘이벤트(Event)’라는 명칭을 붙였다. 연구자는 행위예술을 퍼포먼스와 함께 ‘해프닝’과 ‘이벤트’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3. 탈앵포르멜은 탈평면(탈미술)과 동일시되며 ‘행동하는 화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앵포르멜(Informel)은 표현주의적 추상예술로 자발적이고 주관적인 비정형의 특징을 띠는 예술운동이다.
  4. 문화관광부《한국미술100년(2부) 개최: 한국현대미술 반세기, 그 감동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다》 pp.14-15. 문화관광부. 2006. 서울
  5. 청년작가연립전은 1967년 12월 11일부터 17일까지 신진 작가 그룹 무동인, 신전동인, 오리진이 연합하여 중앙공보관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한국 문화예술정책과 보수주의의 이상이 된 국전을 비판하였다.
  6. 서울현대미술연구소《20세기 한국미술운동사》 pp.163-173. 서울현대미술연구소 도서출판 ICAS. 2010. 서울
  7. 문화관광부《한국미술100년(2부) 개최: 한국현대미술 반세기, 그 감동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다》 p.15. 문화관광부. 2006. 서울
  8.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pp.47-49. 시공사. 2003. 서울
  9.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p.15. 결 출판사. 2007. 서울
  10. 한국행위미술의 전개와 그 주변〉《미술세계》 p.49. 1989
  11. 송윤지 〈제4집단의 퍼포먼스 : 범 장르적 예술운동의 서막〉《미술사학》 pp.349-350. 2016
  12. ‘청년작가연립전’ 작가들은 1967년 11월 15일 제1회 세미나와 1968년 2월 10일 제2회 지방순회강연제을 가졌다.
  13.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p.16. 결 출판사. 2007. 서울
  14. 서울현대미술연구소《20세기 한국미술운동사》 pp.178-180. 서울현대미술연구소 도서출판 ICAS. 2010. 서울
  15.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p.90. 시공사. 2003. 서울
  16. 이건용 〈[기획특집:행위미술] 한국행위미술의 전개와 그 주변〉《미술세계》 p.49. 1989
  17.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pp.92-94. 시공사. 2003. 서울
  18. 서울현대미술연구소《20세기 한국미술운동사》 pp.184-185. 서울현대미술연구소 도서출판 ICAS. 2010. 서울
  19.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p.19. 결 출판사. 2007. 서울
  20. 조수진 〈[제4집단]사건의 전말-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미술사학보》 p147. 미술사학연구회. 2013. 서울
  21. 김구림의 새로운 행위의 방식은 당시 백남준과 동시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제1회 서울 국제현대음악제 전, 후로 김구림과 백남준의 교류가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송윤지 〈제4집단의 퍼포먼스 : 범 장르적 예술운동의 서막〉《美術史學》 p.354.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6
  22. 조수진 〈[제4집단]사건의 전말-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미술사학보》 p145. 미술사학연구회. 2013. 서울
  23. 조수진 〈[제4집단]사건의 전말-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미술사학보》 pp142-144. 미술사학연구회. 2013. 서울
  24.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pp.21-22. 결 출판사. 2007. 서울
  25. 송윤지 〈제4집단의 퍼포먼스 : 범 장르적 예술운동의 서막〉《美術史學》 p.355. 한국미술사교육학회.2016.
  26. 윤진섭은 제4집단의 우발적이고 스캔들과 같은 성격 때문에 궁극적으로 대중의 이해를 얻는데 실패했다고 평했다. 또한 김영나는 삶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민중미술 수준의 정치적 전위주의를 담지 못했다고 말했다. 윤진섭〈한국의 초기 ‘해프닝(Happening)’에 관한 연구〉《예술논문집》 pp.132-133.
  27. 조수진 〈[제4집단]사건의 전말-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미술사학보》 pp75-97. 미술사학연구회. 2013. 서울
  28. 송윤지 〈제4집단의 퍼포먼스 : 범 장르적 예술운동의 서막〉《美術史學》 pp.346-372.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6
  29.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p.23. 결 출판사. 2007. 서울
  30. 이건용은 1973년 파리 비엔날레, 1979년 상파울루 국제 비엔날레, 1982년 에꼴 드 서울전, 1984-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현대미술초대전, 1990년 도쿄에서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전 등 국내외 기획전에 수차례 출품하였으며, 설치 및 행위미술가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1979년 리스본 국제 드로잉전 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포르토 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전재국 《이건용》 p.2. 시공사. 1995
  31. 이건용 《[기획특집 : 행위미술] 한국행위미술의 전개와 그 주변》 p.50. 미술세계. 1989
  32. 정연심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와 미술가의 몸〉 《미술이론과 현장》 제22호 p.109. 한국미술이론학회. 2016. 서울
  33. 강태희 《1970년대 행위미술 이벤트-ST멤버의 작품을 중심으로》 pp.7-10. 현대미술사연구. 2001
  34. 재인용 :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연구 -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pp.20-21. 홍익대학교 출판부. 2017.에서 재인용
  35. 재인용 :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연구 -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pp.20-21. 홍익대학교 출판부. 2017.에서 재인용
  36. RoseLee Goldberg, Performance Art : Futurism to the present, Thames and Hudson, 1988, pp.126-127.
  37. Hal Foster, Hal.,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and Benjamin H. D. Buchloh., Art Since 1900 : Modernism, Antimodernism, Postmodernism, Thames & Hudson, 2005, pp. 459-461.
  38. 재인용 : 정연심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와 미술가의 몸〉 《미술이론과 현장》 제22호 pp.108-109. 한국미술이론학회. 2016. 에서 재인용
  39.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연구 -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p.22. 홍익대학교 출판부. 2017
  40.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연구 -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p.23. 홍익대학교 출판부. 2017
  41.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pp.23-24. 결 출판사. 2007. 서울; 이건용 〈[기획특집 : 행위미술] 한국행위미술의 전개와 그 주변〉《미술세계》p.50. 1989
  42. 정연심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와 미술가의 몸〉 《미술이론과 현장》 제22호 pp.109-110. 한국미술이론학회. 2016. 서울
  43. 이건용 〈[기획특집 : 행위미술] 한국행위미술의 전개와 그 주변〉《미술세계》 p.51. 1989
  44. 정연심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와 미술가의 몸〉 《미술이론과 현장》 pp.110-111. 한국미술이론학회. 2016. 서울
  45.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pp.23-24. 결 출판사. 2007. 서울
  46. 정연심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와 미술가의 몸〉 《미술이론과 현장》 pp.110-114. 한국미술이론학회. 2016. 서울
  47.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연구 -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p.75. 홍익대학 석사논문. 2017
  48.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pp.193-194. 시공사. 2003. 서울
  49.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연구 -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p.77. 홍익대학 석사논문. 2017
  50. 김재권 〈사고(思考) 시스템으로서의 행위예술〉《미술세계》8월. p.40. 1989
  51. 이 바탕에는 1913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회화의 죽음’을 선포한 데 있다. 이후, 전통미학에서 벗어나는 반(反)예술 형태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2. 연극에서의 퍼포먼스는 예술가의 몸을 주어진 공간에 대질시켜 공간에 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행위예술과 유사하다. 하지만 행위예술은 반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갖는다.
  53. 「화랑 내 술집」의 원제목은 「소멸」이었으나, 「화랑 내 술집」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졌으며, 「선술집」으로도 불린다.
  54. 아르코 웹진 www.arko.or.kr/webzine_new/sub1/content_4209.jsp
  55. 정연심 〈한국의 초기 퍼포먼스와 (타자화 된) 예술가의 몸〉p.30. 한국미술이론학회. 2016
  56. 정연심 〈한국의 초기 퍼포먼스와 (타자화 된) 예술가의 몸〉pp.29-30. 한국미술이론학회. 2016
  57. ‘제3회 S.T.’에 출품된 「신문: 1974. 6. 1 이후」는 전시장 벽면에 준비된 4장의 패널에 신문을 게재했다. 기사를 면도날로 오려내는 퍼포먼스의 결과물이다. 오려진 기사는 반투명 아크릴 통속에 버리고, 광고와 사진만이 남은 신문을 벽면의 패널에 하루 동안 게재하였다.
  58. 아르코 웹진 www.arko.or.kr/webzine_new/sub1/content_4209.jsp
  59. 아르코 웹진 www.arko.or.kr/webzine_new/sub1/content_4209.jsp
  60. 이건용 〈[기획특집 : 행위미술] 한국행위미술의 전개와 그 주변〉《미술세계》p.49. 1989
  61. 강태희 〈1970년대 개념미술의 현황: ST전시를 중심으로〉《현대미술과 시각문화》 p.204. 눈빛. 2007
  62. 이건용 〈한국의 현대미술과 ST〉《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Ⅱ》 pp.486-488. 도서출판 ICAS. 2001
  63. 이주연 〈1960~1970년대 한국 아방가르드미술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pp.86-88. 2017
  64.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연구 -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pp.1-5. 홍익대학 석사논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