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진회의 역사와 작품경향 분석 연구

제10호 《Art Pavilion》수록. 2019년 11월 발행
 
신수진 1
 
1. 머리말
2. 연진회의 역사
3. 연진회원들의 작품경향 분석

    1) 산수화
    2) 사군자

4. 맺음말
 
 

1. 머리말

 

1930년대 조선의 봉건사회가 무너진 이후 남종화는 점차적으로 계층 구분 없이 수용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창설된 연진회(鍊眞會)는 광주 전남를 기점으로 전통회화, 즉 남종화를 계승한 단체로 알려져 있다. 연진회의 설립자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이 1938년 광주 금동에 정착하게 되면서 그를 중심으로 단체가 결성되어 지금까지 그 맥이 지속되고 있다. 초기에는 서화 동호인들을 모아 광주지방문화의 풍성하게 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1950년대 이후에는 다수의 후학들을 양성함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지는 광주지역 수묵화단을 확장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초기 연진회는 전문가 이외에 고위 관리 등으로 구성된 문화향유의 공간으로 사용되며 동호회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나, 1960년대 이후 허백련이 춘설헌(春雪軒)에 정착한 뒤 회가 재결성되었을 때부터 전문적인 지방 화단의 성격을 갖게 된다. 1950년부터 1970년대에 회의 왕성한 활동은 허백련의 지도와 중앙 화단 화가들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수많은 화가들이 배출하였다.

본 논문의 목적은 연진회의 역사 및 활동과 연진회원들의 작품경향에 대해 분석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전통회화를 계승하여 광주 및 전남 화단을 어떻게 형성하였으며, 모임을 통해 화단과의 직접적인 영향관계에 대해 살펴보는 데 있다. 또한, 시대에 따라 연진회의 회원과 그들의 작품을 살펴봄으로써 전개과정과 남종화의 작품세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연구 방법은 의재 허백련과 연진회 관련 도록 및 학술지 논문, 단행본, 기사, 전시를 참고하였으며, 연진회의 역사를 중심으로 특징을 파악하였다.

 

2. 연진회의 역사

 

의재 허백련은 전통 남종화를 고수하고 이를 강조하며 두각을 나타낸 남종화가이다. 일생에 걸쳐 고수하였던 남종화에 대한 철학으로 허백련은 ‘최후의 남종화가’라고 불리며 높이 평가되었으며, 특히 그의 이력 중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연진회(鍊眞會, 1938- )의 설립이다. 2

남종화는 조선 봉건 사회가 몰락한 이후 지방화단에 터를 잡고 일반인에게 수용되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아울러, 1930, 1940년대에 한국화의 흐름은 종래와는 다르게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이 시기 서울에서는 김은호와 이상범이 각각 낙청헌(絡靑軒)과 청전화숙(靑田畵塾)을 열어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3 화단에는 부분적으로 무조건적인 외래 화풍의 수용보다는 민족적인 주체성을 자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4 남종화풍은 평양의 윤영기(尹永基, 1833-1927)를 중심으로 한 기성서화미술회(箕城書畵美術會)와 대구의 서병오(徐丙五, 1862-1935)를 중심으로 한 교남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 그리고 광주의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을 중심으로 한 연진회 5가 제일 늦게 결성돼 해방 후까지 그 맥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평양과 대구지방의 남종화풍의 활발한 화단활동은 평양의 개화분위기와 대구의 산업화로 인해 그 명맥이 유지되지 못하였다. 특히 남종화가 광주지역 전통회화의 특징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봉건적 지주문화를 기반으로 한 지역의 사회경제적 양상과 일맥상통한다. 농업 생산력이 풍부한 만큼 지주 계급이 형성한 소비문화가 다른 지역보다 번성한 까닭에 그림의 주문이 많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6

‘참된 것을 연마한다’는 뜻의 연진회는 1938년 의재 허백련이 광주 금동에 안착하면서 그해 1월에 발족된 단체이다. 당시 일본 도청 소재지였던 광주는 호남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입지를 다졌다. 김소영 〈1930~40년대 광주화단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화풍의 모색〉 p.287. 《미술사와 문화유산》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2016
1938년 연진회 발족 당시, 총 36명의 발기인 7이 있었으며 동명 노형규(東溟 盧衡奎, 1876~1947)가 창립 서문을 작성하였고, 당시 전남 경찰국 부장이었던 노주봉이 발의해 창립이 결정됐다. 발기인은 허백련이 중심이 되어 초기 서화동호모임의 형태로 시작된 연진회의 회원들은 화가뿐만이 아닌 정치인, 경제인 등이 있었다. 창립 서문은 아래와 같다.

 

    “예도(藝道)를 배운다는 것은 반드시 그 참된 경지에 이르는데 있으며, 양생(養生)이라는 것은 반듯이 그 참된 근원을 보전하는 일이다. 우리 회(會)가 예생(藝生)에 노니는 것으로 서로 즐거움을 삼는 삶을 보내기 위해 고로 연진(鍊眞)이라 회의 이름을 지으니 그 누가 사치스럽다 할 것인가.
     
    대저 사나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타고난 운명이 서로 달라 어떤 사람은 관직을 맡아 군주를 섬기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을 임무로 삼고 어떤 이는 산간임하에 살면서 자연에 있는 것들을 먹으며, 물을 마시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으니 옛날 사람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가슴에 품은 의미는 한결 같다.
     
    생전에 하는 바는 서로 달라서 우리들은 서로의 위치를 알게 되니, 우리가 이미 부귀를 행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면 때를 놓치지 않고 삶을 사는 것이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시서화 세 가지가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다. 가슴이 깨끗하고 맑아 정직하고 겸손한 취향이 다른 예술보다 특별한 것은 참된 길을 간 즉, 사람이 사랑하고 아끼며 신그러움 또한 귀하다. 마음을 필요없는 곳에 낭비하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습작하며 강론하고 서로 즐기고 웃고 양생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삼가(三家) 삼절(三絶)을 이루리라. 8

 

연진회의 서문에 따르면 고위고관부터 직업을 특정하지 않는 이, 전문 서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시·서·화 삼절을 좋아하여 모인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위 낙청헌, 청전화숙은 도제식 교육기관의 형태를 갖고 있었지만, 연진회는 서화를 즐기는 이들이 모인 미술단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style=”text-align: justify;”>회원은 연진회 설립 당시 발기인을 포함하여 의재에게서 사사받아 화가로서의 길을 걷거나 그 실력을 인정받은 정회원, 그림을 배우는 연구생과 서화애호가, 후원인사들은 명예회원과 중회원이 있었다.

정회원 중에는 조선미술전과 서울의 서화협회회원으로 참가하며 이미 화가로서의 자리를 굳힌 동강 정운면 등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당시 서울 화단의 증진인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와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 등도 찬조회원으로 가입되었다. 결성 당시 30대 중후반을 넘긴 장년층이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호남지방 지주 계층의 자제들이었다. 실제로 연진회 단체전에 출품한 작가들은 회원 구성원 중 소수에 그쳐 대부분이 화회를 통해 허백련으로부터 간단히 묵법을 배우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통상회원 중에는 당시 고위 공무원들이 대다수였다. 예를 들어 통상회원의 경우 이원보는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내무국장을 맡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민병기는 서울 출신의 의사로 전라남도 보건사회국장이었고 해방 이후 전라남도 지사와 내무부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오석유와 김동곤은 군수였으며 김태집은 서석공립심상소학교 교장이였고, 변화사로 활동했던 이덕우, 노주봉은 당시 전남경찰국 부장이었다. 일본인인 야노 슌지도 공무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화에 관심이 있어 연진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전후 광주에서는 서화 수집열풍이 불어 신흥 귀족계급과 광주 토박이 지주 사이에서 유행했다. 당시 허백련의 작품 소장자들로서 함양의 양지환, 광주의 조덕환, 현준호, 고광표, 최정숙, 정운면, 박현경, 김대우, 권계수와 김홍열, 이애주 등이 있었으며, 이들 중 몇몇은 후원자 역할을 했다. 대부분은 이전부터 허백련의 경제적 후원자였다. 이 때 허백련은 연진회를 운영하면서 그 안에서 작품 감정의 고문역할을 위해 위와 같은 인물들이 많이 찾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당시 연진회의 교육법은 회원들은 일주일에 하루씩 월 5원의 회비를 내고 모여 글과 그림을 즐겼으며, 의재가 체본을 그리고 회원들은 그것을 모방하는 식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가끔은 경치 좋은 산과 물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회원들의 그림은 의재가 조언을 해주고 서툰 곳은 수정해주었다. 초기 연진회는 전문적인 작가 양성의 목적보다는 서화를 즐기고자 하는 동호회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이후 새로운 회원이 증가하였고 회관의 필요성을 느끼자,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1939년 봄, 당시 광주 도청 옆에 있던 광주상품진열관에서 회관 설립을 위한 회원전을 개최하여 기금을 마련했다. 찬조회원인 김은호와 변관식의 작품, 그리고 회원들의 작품이 전시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이 의재의 그림이었다. 제1회 연진회전에는 48점, 2회에는 75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제1, 2회 연진회전에는 의재와 관계가 깊었던 이당과 소정 그리고 고희동이 찬조 출품을 하였으며 전람회 참가인원수는 1,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8년 의재가 전주에서 진행했던 개인작품전 수익금을 여기에 보태어 광주시 남동 현남동시장 자리에 백평의 토지를 구매하여, 백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이의 큰 화실과 별도의 거취할 수 있는 방 하나를 구비한 회관을 건립했다. 9

 

    남조선지방에서 유일한 조선인단체인 연진회에서는 공사비 칠천여원으로 회관을 신축낙성하엿다. 전남 광주부내에잇는 연진회는 화백 의재 허백련씨를 중심으로 동호자 이십여명이 소화 십삼년 일월 십육일에 창립한 이래 회원 일동은 조선서화연구에 정진중이였으나, 회관이 없음을 유감히 여겼던 바 금년 봄에는 공사비 칠천여원으로 금정 54번지에 신축낙성하였으므로 자축기념서화전람회를 오는 28, 29일 양일간 신축회관에서 개최하려고 준비중이라고 하며 일반은 연진회에 대한 기대가 더욱더 확대되어 간다고 한다. 10

 

연진회관을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서화지도를 시작한 1939년에는 연진회 회원 가운데 4명이 조선미전에 입선하는 등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1 연진회 회원 가운데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로 사군자에서 구당(九堂) 이범재(李範載, 1910-1993)와 근원(槿園) 구철우(具哲祐, 1904-1989), 지봉(智峰) 정상호(鄭相浩, 1903-1979)를 들 수 있다. 1930년대 결성된 연진회는 연진회관을 통해 기존 전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서화가들을 모으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연진회 활동은 진행되었으나 1944년 7회 모임을 가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회원들이 피난을 가기 시작했고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연진회의 다수가 피난 중 사망하고, 광주를 떠나면서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1950년에 초기 연진회 회원이었던 근원 구철우, 허행면, 목정 최한영(牧丁 崔漢永, 1899-1990)을 비롯한 서화인들이 광주 호남동의 완벽당 화랑(完碧堂 畵廊)에 모여 연진회 재결속하게 된다. 완벽당 화랑은 회원이었던 최원택이 경영하던 표구점이었다. 완벽당 화랑에서는 매주 토요일 모임이 있었고, 교육법은 이전과 같은 방식이었으며 합작을 하는 등 각자 작품으로 감상회를 개최하였다. 그 중 훌륭하다고 평을 받은 작품은 장원 상을 주었다.

허백련이 호남동에서 춘설헌으로 거주지를 옮겼던 즈음부터 연진회는 다시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그가 화단 활동을 잠시 중단한 채 농촌부흥활동에 매진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최흥종 목사의 도움을 받아 농업고등기술학교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무등산 증심사 계곡의 오방정(五放亭)이로 불리는 건물에서 삼애학원(三愛學院) 삼애(三愛)는 조상을 받드는 하늘(天), 풍요를 기르는 땅(地), 사랑하는 사람(人)이 되어야한다는 세 가지 요소이다. 하늘과 땅 사람을 사랑하자는 홍익(弘益)사상이기도 하다.
을 설립하였으며, 1947년에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농업기술학교의 재설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다시 연진회로 복귀하였다.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이 시작되게 된다.

이후 연진회는 허백련의 춘설헌 생활시절에 입문한 세대로 구성되었다. 이 세대
1950년대 의재 허백련과 연진회원들
는 허백련의 직접적인 사사를 받으면서 사승관계가 뚜렷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회원들은 기본적으로 처음 서예를 배운 후, 허백련의 작품을 직접 보고 모사하면서 배웠으며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 직접 체본을 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밖에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 모사를 하기도 했다. 정명중 〈‘반근대적 근대성’과 인격주의 –의재의 근대체험과 연진회-〉 p.74《호남문화연구》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7
지도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교육을 진행하였다. 동호회적 성격이 짙었던 초기 연진회의 회원과는 다르게 1950년대에 들어서서는 회원들은 허백련을 스승으로 우대했으며, 허백련이 머물던 춘설헌에 머무르고 그림을 배웠다.

1962년 전남미술협회가 창설되고 잇달아 국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전라남도미술대전이 1965년에 개최되었다. 당시 광주공원에 신축된 광주시립박물관과, 충장로 광주학생회관 전시실이 개방되었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전시 공간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또한, 전라남도미술대전의 창설은 지역 화가들에게 등단의 기회가 되는 무대이자, 창작활동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수묵채색화단은 개인 활동 위주로 전시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수묵화가를 양성해내는 역할도 겸할 수 있었다. 주로 1950년대 말부터 국전에 이름을 내기 시작했는데, 꾸준히 입상자를 배출하였으며 일부는 추천작가,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통 수묵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고, 현대화를 위해 전통을 계승하며 주제와 재료, 색채에 있어서 변화를 주고자 하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연진회의 경우, 기본적으로 수묵을 중점으로 두었지만 개인에 따라 채색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동호회적 성격이 짙었던 초기 연진회에 비해 작가, 후학 양성을 중점으로 둔 활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6년 연진회 이범재 회장을 중심으로 화단의 비중 있는 중견작가로 성장한 27명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재결성되었다. 각자 활동해왔던 회원들에 의해 회칙을 바뀌는 등 연진회가 재출발하였으며, 전시회를 개최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연진회미술원을 개원하여 후진 양성을 하고자 한 때이다.

1938년 연진회 창설 때 활동했던 구철우, 허행면 등의 서화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후 호남동과 춘설헌 출신의 허의득, 이상재, 김옥진, 오우선, 문장호, 박행보 등과 그 아래 세대인 조승현, 이강술, 양계남, 장찬홍, 박소영, 김춘 등이 의재 허백련의 남종화풍을 배우고 전통을 이어갔다. 이들은 정회원을 두고 준회원과 후배들을 지도하며 계보를 형성하였다.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자리에 초급부와 전문부 주야간 과정의 연진회미술원을 개설하였다. 연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연진회미술원을 직접 운영하면서 동시에 강사진으로 나섰다. 구철우, 박행보, 문장호, 허의득, 이상재, 남경희, 장찬홍, 박소영, 김춘, 김경애, 김재영, 박병열, 정기봉, 김정란, 감형인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연진미술원에서는 기초부터 일정단계까지 전통화법의 수련과정을 단계적으로 운영하여 전업 작가를 양성하였다. 보통과와 전문과, 연구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분야를 다루었으며, 설립된 지 2년 만에 약 800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보통과는 1년 과정으로 난, 국, 목련, 포도 등과 서예를 병행하여 익혔으며, 전문과는 2년 과정으로 묵화, 화조, 산수화, 준법 등 기초법을 익힌 산수화 완성기에 도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는 보통과를 수료해야만 입학이 가능하였다. 전문과 수료 후 작업을 계속하기 바라는 학생들을 위해 1994년부터 연구과를 개설하였다.

작가들의 입문기구로서 한국화의 대중화를 추구함으로써 호남남종화의 맥을 이어가는 주요 기관이 되었다. 연진회미술원 1기 출신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작가로는 김인화, 김병숙, 조재환, 양성택, 정기봉, 정성봉, 박문종, 김재일 등이 있다. 연진회 제자들은 허백련으로부터 받은 체본과 그의 작품들 중의 일부 그리고 화첩 및 문하생이 그린 것을 복사하거나 사진을 교본으로 사용하면서 학습하였다. 12

허백련의 제자인 문장호는 1965년 3월 삼희화실(三希畵室)을 열고 제자를 양성하며 수묵 남화를 지도하였다. 문장호의 화풍은 전통 남종화의 소재와 구도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강약과 농담을 살린 산수이다. 문장호의 화실 출신으로는 김영수, 김대양, 서영숙, 최영임, 고영순, 박호순, 한상요, 구영주, 김숙, 이준섭, 손호근 등이 있는데, 이들은 수묵회(樹墨會)를 결성하여 1971년 첫 창립전을 갖기도 하였다. 13 이들은 또한 김대원, 김부장, 박희석, 윤복희, 조영랑, 홍성국 등 차세대 작가들을 배출하였다. 이외에도 허백련과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으로부터 문인화와 서법을 배운 박행보가 국전 문인화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1970년대 후반부터 계림동 사랑채에 화숙을 만들어 후진들을 지도하였다. 아울러, 연진회는 후학 양성 외에도 전남도전, 광주시전, 무등미술대전의 운영위원,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면서 제자 양성에 영향을 미쳤다.

연진회 일원들은 연진회미술원의 강사로 나섰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대학에 출강하거나 재직하면서 기존 전통 교수법에 서구식 교육방식을 결합하여 후진을 양성한 경우도 있었다. 이창주와 양계남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있었고. 그 외 김옥진, 문장호도 각각 조선대 미술교육학과와 전남대 미술학과에서 수묵채색화를 가르쳤다. 박행보는 조선대와 전남대 대학에 출강하였고 호남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 때 양계남은 허백련이나 문장호로부터 전통 남종화를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남종화와는 전혀 관계하지 않는 독자적인 양식을 개척하였고, 자연스럽게 그의 학생들에게도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3. 연진회원들의 작품경향 분석

 

연진회는 설립자 허백련의 사상과 그의 지도를 통해 후학을 양성하거나, 화단 교류로써 그 맥을 이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허백련과 연진회의 작품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허백련은 이에 회의 설립자 허백련의 작품세계를 산수화, 사군자로 분류하여 연진회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의재 허백련은 1891년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면 남동리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말기 서화가인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이 그의 증고조부였다. 허백련이 어렸을 때, 운림산방 1856년 허련이 진도로 내려와 작품 활동을 한 장소이다. 운림산방은 허련의 아들 미산 허형과 손자 남동 허건, 그리고 방계인 의재 허백련을 통해 그 맥을 이었다.
에서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 1858-1936)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으로부터 화법을 익혔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1917년 당시 일본 남종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40-1945) 14의 화숙에 들어가 남화를 수학했다. 이후 1922년 허백련은 일본에서 돌아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서 「추경산수도」로 2등을 수상하면서부터 이름을 알렸으며 6회까지 출품하였다.

초기 허백련의 작품에서는 미점으로 화면을 채웠으며 고법을 전수하는 방향으로 작품이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삼원법 구도에 피마준(披麻皴)과 미점법(米點) 15을 활용하여 전통적인 표현 방식에 따라 자연을 표현해 냈다. 전통적인 방식의 남종화를 임모하였던 초기의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1938년 이전까지 방랑 생활을 하다 광주에 정착하며 연진회를 창설하고, 농업학교 운영을 하게 되면서 작품에서는 사생을 통해 구도와 소재를 점차 변화시키게 된다. 특히 진경산수에 집중하게 되고 혼점(混點)과 우모준(牛毛皴)을 사용하며 자신만의 남종화풍으로 바꾸어 나가게 된다. 초기와 비교해서 관념산수를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951년 무렵부터는 가벼운 필법의 표현으로 갈필과 준법 양식을 사용하게 된다. 당시 허백련은 농촌부흥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주된 작품은 농경사회의 이상을 담고 있는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1) 산수화

 

1930년대를 전후하여 전통회화는 다양화되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서화협회전(書畫協會展)이나 조선미전 등 근대적인 대규모 전람회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경향의 소재나 양식이 등장했고,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사의적인 수묵화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화법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진회 창설전 허백련의 초기 화풍은 미산 허형의 문하에서 배운 소치 허련의 필묵과 이후 일본에 건거나 고무로 스이운에게 배운 남화풍이었다. 조선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대체로 고법에 충실한 형식주의적인 작품들이었으며, 초기작으로 꼽히는 청산백수는 5회 조선미전에 입선했던 작품이다. 미점으로 여름날의 풍경을 그림 산수로, 구도나 필치에서 화보풍의 영향이 보인다. 16 1930년대와 1940년대는 허백련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 즉 의재산인(毅齋散人)시기 17로, 초기의 고법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풍토감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낮은 그 외 실제 주변의 소박한 자연 풍경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남종화적인 요소와 접목시켰다. 18

이러한 화풍은 산수화에서 소산 정규원, 춘포 허규, 백양 조정규 등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소산 정규원의 경우 연진회 창립전부터 허백련에게 그림을 배워 대체로 화풍이 비슷하다. 전형적인 삼단구도를 비롯하여 갈필과 담채를 사용한 전통적인 화풍을 볼 수 있다.

그 중 독자적인 화풍을 창출한 동강 정운면과 목재 허행면이 있다. 동강 정운면은 1920년대부터 광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남종화를 바탕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일본 남화풍을 가미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한 화가로 평가된다. 19 연진회에 참여한 정운면은 전통적인 남종문인화를 그리게 되며, 화제시는 당시를 주로 썼으며 비슷한 시기 허백련의 산수화에도 같은 화제가 발견된다. 전체적인 구도와 필치에서 허백련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근경의 언덕, 원경의 주산 등에서는 적묵법을 볼 수 있다. 정운면은 허백련과 함께 연진회 활동을 하면서 전통적인 남종화법을 사용하여 여러 폭의 산수도를 남겼지만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종화풍과 채색화풍을 함께 구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 수묵을 중요시하는 허백련과의 의견 차이로 연진회를 탈퇴하기까지 이르렀다.

목재 허행면은 연진회에 참여하여 허백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허행면의 초기 작품들은 ‘허백련과 구분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의 하경산수는 허백련이 사용한 구도와 유사하며 필법도 닮아 있다. 허행면이 허백련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 공부를 했던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화면 중앙 근경의 언덕 위에 가옥을 중심으로 수목을 배치하고 안개로 넓게 펼쳐진 주산과 구분하였다. 절벽은 짙은 묵점을 중첩시켜 표현하였으며, 원근의 구별이 모호한 점이 있다. 이 작품의 구도는 허백련의 조선미전 제4회 입선작 호산청하에서 빌려온 듯 보인다. 20 정운면과 허행면이 전통남종화법을 토대로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다고 한다면, 소송 김정현과 남계 조복순은 남종화법을 배웠으며 주제와 소재 선택, 표현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화풍을 구사한 작가들이다.

연진회는 산수화를 여러 폭으로 구성된 사계산수병풍으로도 많이 제작하였는데, 주로 한 폭 당 계절 하나씩을 주제로 삼은 각 폭 병풍 형식으로 남아있다. 병풍 형식으로 자주 활용되어 제작된 까닭은 근대기에 들어 주거공간이 확대되었고, 서화 수요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병풍의 수요가 늘어났던 보편적 현상의 일환으로 보인다. 또한 허백련과 연진회가 산수화에 주력했었던 만큼 사계산수가 각 폭 병풍 양식에 적용하기 적합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1

1950년대 이후, 국전과 전남도전 동양화부 출품작 목록을 살펴보면 박소영의 사생풍 화조화 두 점을 제외한 모두가 산수화가 초기 연진회 작가들과 비슷한 화풍임을 알 수 있다. 22 다만, 관념산수화에서 실경산수화 양식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관념산수화는 회원들의 창작활동 초기라고 볼 수 있는 시기인 1950-1960년대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연진회의 화업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작품들은 당연하게도 허백련의 산수화 양식과 유사성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고정된 구도와 전통적인 준법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간에도 차이를 거의 두지 않는 모습으로 창작활동이 전개되었다. 전통화법 관념산수화 양식은 구도적, 기법적인 측면에서 자연스레 허백련과 전기 연진회의 화풍과 연결된다. 23 또한 작가별 개성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유사한 구성을 보이면서 전통적 준법을 충실히 사용하는 남종화 창작활동 초기 단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실경산수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서는 한국학진흥책 등의 시대적 흐름으로 한국화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문장호는 발묵법을 사용한 운무, 소나무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그의 기법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근중원경에 따른 삼단 구도를 따르고 있고, 근경이 확대되어 나무의 질감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문장호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관념산수화에 실경의 요소를 끌어들였다. 또한 관념산수화와 실경이 혼합된 과도기적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경향도 찾아볼 수 있다. 회원 김옥진은 196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구름을 주제로 한 산수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산의 형세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풍경에 세 마리의 학이 날아가는 모습을 추가함으로써 속세와 분리되어 있는 이상적인 공간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허백련의 시범과 화보풍을 참고하는 등 지도 방침을 토대로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작품이 확대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사군자

 

허백련의 도제식 교육 방법은 사군자를 가장 기초적인 화목으로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이를 가르치는 기간도 길었다. 처음 사군자의 기본인 난초 치기부터 시작하여 매란국죽을 익히고 1-2년이 지난 뒤에야 산수화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는 연진회미술원 또한 그 방침을 따르고 있다. 연진회의 매화 양식은 허백련과 구철우에 의해 주도 되었다. 구철우의 매화 그림은 허백련의 매화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연진회의 묵매화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허백련과 구철우의 매화는 비백법(飛白) 24을 사용하여 매화의 굵은 주가지를 그린 뒤 농묵의 큰 태점을 가지 주변에 찍는 것이 기본이며, 주가 되는 가지의 아래에 가느다란 가지를 배치한 모습을 갖고 있다. 25 태점을 과감하게 찍음으로써 양감을 표현하고, 대조적으로 잔가지는 가늘게 표현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법은 회원 김승희와 김태집의 작품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특히 대부분 대각이 좌, 우로 각각 위로 솟아오르는 구도를 따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허백련의 작품 「매월(梅月)」에 보이는 것과 동일하게 사군자 양식이 현대까지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허백련의 「묵란(墨蘭)」은 다듬어지지 않고 난 잎이 수북히 자란 야생란을 표현했으며 뿌리를 그리지 않았다. 난 주변부를 측필로 여러번 찍어 낮은 풀이나 흙을 표현한 점이 큰 특징이다. 아울러, 난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화면 우측에 수직으로 배열하는 구도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와 같은 구도는 연진회 회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김태집의 묵란과 마찬가지고 김화래, 김춘의 묵란 또한 상하로 구성된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 한편에 치우친 구도를 취하면서 방향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국화는 꽃이 흐드러진 듯 꽃잎들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고 듬성듬성 열려 있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허백련의 말년에 갈수록 두드러진다. 아울러, 종에 관계없이 꽃의 크기가 작은 편이며 꽃술이 강조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국화 잎사귀는 몰골법을 사용하여 간략하게 표현하였고, 잎맥은 짙은 선으로 그려내었다. 보통 허백련의 국화는 대국이 대다수이나, 연진회원들은 다양한 종의 묵국화를 제작하였으며 정돈된 형태를 보인다. 26

대나무의 경우, 가느다란 대만을 남겼으며 붓의 농묵을 살려 입체감을 표현하기 보다는 선을 위주로 그려내었다. 퍽퍽한 갈필이 아닌 물기가 많은 먹으로 빠르게 이어 그었고, 대의 마디를 그위에 덧대어 나타냈다. 대나무와 함께 표현한 돌은 갈필로 간략하게 그리되, 태점은 자유로운 형태로 찍어 표현하였다. 보통 대나무의 잎은 끝부분을 가늘게 하는 형태로 표현되지만, 잎의 모양은 정갈하지 않으며 그 자체의 동세를 표현하기 위해 뭉툭하거나 갈라진 모습을 띠고 있다. 연진회원들도 이러한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개인의 역량에 따라 태점을 많이 사용하거나, 괴석과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정돈된 형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매란국죽을 제외한 화훼류 중에서 연진회원들이 가장 많이 다룬 소재는 모란이었다. 몰골법을 사용한 허백련의 모란화 양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그 전통을 이었다. 허백련의 모란화는 꽃잎이 바깥으로 펼쳐지면서 넓적한 느낌을 는 것이 특징이다. 꽃잎을 그릴 때는 붓을 눕혀 썼으며, 꽃의 중심부에 채색을 가미하기도 했다. 국화와 마찬가지로 모란 형태는 입체적이기 보다는 낱장들이 자유롭게 묘사되어 있어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세밀한 묘사보다는 간략하게 표현한 것이 연진회의 모란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연진회의 회원들은 허백련의 양식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 회원들끼리 서로 구도와 소재 구성을 비슷하게 함으로써 스승 문하에서 체본을 통해 사군자를 습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맺음말

 

본 논문은 연진회의 전개와 허백련 및 회원들의 작품활동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이들의 상호관계와 의미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1938년 연진회의 결성부터 시작하여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이어지는 연진회는 허백련의 교육방침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모임의 성격, 작품의 변화를 확인하였다. 초기 연진회는 서화동호모임으로써 문화향유과 밀접한 공간을 만들어내었으며, 동시에 신남화풍의 영향과 당시 활동에 대해 알아보았으며, 후기에는 교육기관의 성격을 갖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화풍을 전수하며 광주 수묵화단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허백련 타계 후 연진회미술원을 운영하여 다음 세대를 양성하는 시기로, 새로운 재료, 구도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남종화의 확장을 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진회는 일제시대 서화회의 가장 마지막 주자로 발족하였지만 가장 오랜시간 동안 전통 남종화를 고수해온 수묵채색화 단체로서 의의가 크다. 회원들 중 일부가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지방 서화단체로서는 특기할만한 성적을 내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중앙화단과도 긴밀한 교류 관계에 있었다. 중앙화단과의 교류, 다른 지역의 서화가들과의 관계를 통해 연진회는 당대 유행하는 새로운 화풍에 대한 관심을 갖기도 하였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예술을 대하는 입장이 세대마다 달라졌으며, 예전의 도제식 교육 방법으로는 더 이상 효용되기 어려워졌다. 그로 인해 연진회는 회원이 줄고 있으며 예전보다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연진회는 80여 년에 이르는 역사는 광주화단 남종산수화의 명맥을 유지시켰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남종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모임으로써 수묵화단을 풍성하게 한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김소영 〈1930~40년대 광주화단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화풍의 모색〉 《미술사와 문화유산》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2016

박동철 〈병품으로 본 민속예술의 생산과 소비〉 《실천민속학연구》 11. 실천민속학회. 2008

이선옥 〈남도회화의 성격과 발전과정-허련과 허건의 인정욕구를 중심으로〉 《남도문화연구》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3

이선옥 〈의재 허백련의 《금강산도십곡병》과 남종화전통〉 《호남문화연구》 제 59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8

이선옥 〈해방 이후 광주화단과 목재 허행면〉 《호남문화연구》 제62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1

정명중 〈‘반근대적 근대성’과 인격주의 –의재의 근대체험과 연진회-〉 《호남문화연구》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7

최혜영 〈후기 연진회의 사군자 연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전라남도미술대전 출품작을 중심으로〉 《호남문화연구》 제62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8

홍윤리 〈해방기의 조선미술동맹 광주지부 전람회에 관한 연구〉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9집.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김종, 정인서 《무등산이 된 화가 허백련. 오지호》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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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열, 원동석 《韓國近代繪畵選集 韓國畵7 許百鍊/許楗》 금성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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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미술문화연구소 http://gwangjuart.com/

광주시립미술관 http://artmuse.gwangju.go.kr/

호남학연구원 http://www.homun.or.kr/main.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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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미술평론경영 전공 석사 3기
  2. 이구열 《근대 한국화의 흐름》 pp.87-90. 미진사. 1984
  3. 김소영 〈1930~40년대 광주화단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화풍의 모색〉 p.288. 《미술사와 문화유산》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2016
  4. 김종, 정인서 《무등산이 된 화가 허백련. 오지호》p.69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2014
  5. ‘나는 이당 김은호와 서양화가 박광진, 조각가 김복진 등이 주동한 조선미술원에 관여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이름만 올렸을 뿐 동양화부 강의는 이당이 도맡아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은 그 일에 내가 크게 관여한 양, 또는 평가할 만한 업적인 듯 내세워준다. 하다보면 이렇게 그럴싸하게 경력을 만드는 예도 있겠으나, 나의 경우는 연진회 같은 게 크게 보람되고 자랑할 만하다 생각하다.‘ 허백련 《나의 이력서 32》 한국일보 1975.8.28. 참고
  6. 유홍준 《개화기 구한말 서화계의 보수성과 근대성》 구한말의 그림. p.89 학고재. 1989
  7. 취석 이원보(翠石 李源甫, 1889-1968), 소당 오석유(韶堂 吳錫裕), 동강 정운면(東岡 鄭雲葂, 1906-1948), 백양 조정규(伯陽 趙定奎, 1892-1966), 서운 임신(栖雲 林愼, 1907-?), 유인 조덕환(有鄰 趙德煥), 남재 민병기(南齋 閔丙棋, 1901-1973), 송계 노주봉(松溪 盧周鳳, 1900-1945), 구당 이범재(九堂 李範載, 1910-1993), 춘파 김동곤(春坡 金東坤), 남사 최기일(南史 崔奇一), 원당 최정숙(園堂 崔正淑), 우서 김병댁(又西 金炳宅), 목정 최한영(牧丁 崔漢永, 1902-1988), 춘포 허규(春圃 許圭, 1913-1977), 길매 박하연(吉梅 朴夏淵), 백아 양지환(白我 梁址煥), 지당(知堂), 혜정 어광선(惠庭 漁光善), 남계 조복순(南溪 曺福谆), 송헌 심상엽(松軒 沈相燁), 운곡 최진섭(雲谷 崔珍燮), 서학 김태짐(捿鶴 金泰楫), 장영규(張泳奎),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 카시엔 야노 슌지(柏園 矢野俊二), 목재 허행면(木齋 許行冕, 1906-1964),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근원 구철우(槿園 具哲祐, 1904-1989), 수송 박영해(秀松 朴英海), 이덕우(李德宇), 남파 황태율(南坡 黃泰律), 마쓰자와 쇼이치로(增澤壯一郞), 소송 김정현(小松 金正炫), 정상호(鄭相浩, 1899-1979)
  8. 연진회 발기문 발췌. 1938
  9. 김종, 정인서 《무등산이 된 화가 허백련. 오지호》p.38.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2014
  10. 동아일보 1940.4.25. 書畵硏究團體서화연구단체의 鍊進會舘新築연진회관신축
  11. 홍윤리 〈해방기의 조선미술동맹 광주지부 전람회에 관한 연구〉 p.109-115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9집.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12. 김종, 정인서 《무등산이 된 화가 허백련. 오지호》 p.86.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2014
  13. 광주시립미술관 http://artmuse.gwangju.go.kr/
  14.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40-1945)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남화가이다. 사생풍의 남화를 모색하고, 일본 관전과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심산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본 외에서도 폭 넓은 활동을 하였다.
  15. 피마준(披麻皴)은 약간 구불거리는 실 같은 선들을 엮어놓은 형태로 거친 느낌을 주는 준법이다. 미점법(米點)은 토산이나 산에 수림을 표현할 때 붓을 옆으로 기울여 점을 찍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16. 심세중 《의재 허백련 :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p.98. 디자인하우스. 2001
  17. 의재 허백련이 193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연진회 창설과 농업학교 운영을 하던 시기로 초기의 고법 형식을 벗어나 실경 사생을 통해 소재와 구도의 변화를 주었으며, 전라도의 낮은 산야, 진경풍, 청록산수, 농경산수들을 제작하며 독자적인 화풍으로 만든 시기이다.
  18. 김소영 〈1930~40년대 광주화단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화풍의 모색〉 p.289. 《미술사와 문화유산》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2016
  19. 김혜영 〈동강 정운면의 생애와 작품세계〉 《호남문화연구》 제43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8. pp. 139-174
  20. 이선옥 〈의재 허백련의 《금강산도십곡병》과 남종화전통〉 p.189. 《호남문화연구》 제 59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8
  21. 박동철 〈병품으로 본 민속예술의 생산과 소비〉 《실천민속학연구》 11. 실천민속학회. 2008
  22. 최혜영 〈후기 연진회의 사준자 연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전라남도미술대전 출품작을 중심으로〉 p.320. 《호남문화연구》 제62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8
  23. 이선옥 〈해방 이후 광주화단과 목재 허행면〉 p.241.《호남문화연구》 제62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1
  24. 비백(飛白)은 갈필로 그은 묵선에 먹이 묻지 않은 빈 공간을 말한다.
  25. 최혜영 〈후기 연진회의 사군자 연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전라남도미술대전 출품작을 중심으로〉p.321. 《호남문화연구》 제62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8
  26. 최혜영 〈후기 연진회의 사군자 연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전라남도미술대전 출품작을 중심으로〉p.315. 《호남문화연구》 제62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8